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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만난 로마의 관원들

안산차도리 2009. 9. 20. 23:08

바울이 만난 로마의 관원들

 

바울이 유대인의 손에서 벗어나 무사히 로마로 갈 수 있었던데는 비교적 공정하면서도 합법적이었던

로마 관원들의 덕이 컸다.

하나님께서는 바을을 인도하실 때 공정한 절차를 가치 있게 여겨 실천하려 노력했던 로마의 관원들과

정치 및 사법 제도를 이용하셨다.

성경에는 바울과 관련되어 일부분만 소개된 그들에 대해 좀 더 알아보자.

 

글라우디오 루시아

로마의 천부장이며 예루살렘 수비대의 지휘관이었다.

예루살렘 수비대는 성전과 인접한 안토니아 망대에 주둔하였기 때문에 바울을 해치려는 유대인들의

폭동이 관내에서 일어났을 때 즉시 출동할 수 있었다.

바울이 루시아에게 헬라어로 말을 걸었던 사실(행21:37)과, 그가 로마 태생이 아닌데도 로마 시민권을

돈을 주고 얻었다는 사실(행 22:28). 그리고 그의 성이 글라우디오(행 23:26)인 것을 보아, 그는 아마도

그리스도인으로서 로마 시민권을 얻었을 때 글라우디오 황제의 성을 따서 이름을 만들었을 것이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글라우디오 황제의 황후와 환관은 성씨를 팔아 부를 쌓았다고 한다.

 

벨릭스

그의 성명은 안토니우스 벨릭스이다.

원래는 노예 신분이었으나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절 자유민이 되었다.

수리아 통치자 쿠아드라투스의 임명을 받아 유대의 총독이 되었다.

벨릭스는 잔인한 통치자로 악명이 높았다.

한때 폭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대제사장 요나단을 살해하기도 했다.

그가 가이사랴에서 통치하는 동안 바울 사건을 만났는데 폭군 벨릭스도 복음을 단호하게 증거하는 바울

을 함부로 대하진 않았다(24:24~25).

물론 바울이 로마시민이라는 사실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였다.

바울의 사건을 조속히 진행하지 않고 2년이나 바울을 구류한 벨릭스(아무리 폭군이어도 유대 군중의

비위는 맞추어야 했음)는 바울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총독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기록에 의하면 총독의 임무를 잘못하여 로마로 소환되어 처벌 받았다고 한다.

 

베스도

라틴어로 발음하면 포르키오스 페스토스.

벨릭스의 후임으로 유대 총독이 된 사람이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베스도를 벨릭스보다 훨씬 능률적이고 세심한 통치자로 평가했다.

사도행전 25장에 베스도가 바울 사건을 처리한 것을 보면 그런 평가가 사실임을 잘 증명한다.

바울은 베스도 앞에서 황제에게 상소하겠다고 했으며 베스도는 그의 청원대로 실행했다.

로마는 황제 정치가 수립된 이후 황제의 재판이 발달하면서 상소가 정기적으로 황제 앞으로 올라갔다

고  한다.

 

헤롯 아그립바 2세

사도행전 본문에는 아그립바라고만 표기되어 있다(행 25장).

로마 황실에서 양육을 받았으며 그의 아버지 아그립바 1세가 죽은 후(세배대의 아들 야고보를 처형하고

베드로를 옥에 가두었다가 실패했으며 후에 스스로 신으로 자처하며 연설하다 급사함. 행 12:20~23 참고)

왕위를 이어 받았을 때는 불과 17세 소년이었으므로 그의 영토는 한시적으로 로마 총독들의 통치를

받았다.

주후 50년경에는 숙부 헤롯의 뒤를 이어 현재의 레바논 지방인 칼키스의 왕이 되었고,

주후 54년 황제가 된 네로는 아그립바 2세에게 디베랴를 비롯하여 많은 영토를 붙여 주었다.

아그립바 2세는 누나 버니게와 근친상간을 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지만, 정치적으로는 제사장직에 대한 통제권을 여전히 행사했다.

그런 이유로 베스도는 아그립바가 유대 종교에 있어서 권위를 가지고 있으며 바울의 사례를 충분히

심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행 25:13 이하 참고)

 

네로

바울이 베스도 앞에서 가이사 즉  로마 황제에게 상소하겠다고 했을 때, 당시 로마 황제는 네로였다.

네로의 어머니가 전임 황제 클라우디우스를 독살하고 네로를 황제 자리에 올렸다.

주후 64년 로마의 절반이 전소된 화제의 배후에 네로가 있었다는 소문이 퍼지자,네로는 화제 책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돌리면서 기독교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터툴리안, 유세비우스 등은 사도 베드로와 바울 모두 네로의 박해 때 순교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스스로 위대한 예술가라고 굳게 믿은 네로의 학정도 주후 68년 막강한 반란에 의해 끝나게 된다.

원로원이 네로를 국민의 적으로 선포하자 네로는 자살했다.

 

큰숲 맑은 샘 2009년 9월호 이달의 말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