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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고찰 영주 부석사-20150527

안산차도리 2015. 5. 31. 17:00

영주 부석사

5월 한 낮의 뙤약볕이 내리쬐는 날에

5년만에 영주 부석사에 다시 들렀습니다.

주 부석사는 한국 화엄종(華嚴宗)의 본산으로

676년(신라 문무왕 16) 의상(義湘)이

왕명을 받들어 창건한 사찰입니다.

시원한 인공폭포와 분수로

물안개가 자욱히 깔리네요.

이 안내문 때문인가?

이번에 들릴 때는 쓰레기를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산나물 팔러 나오신 할머니들...

관광객들이 노인정이나 노인대학에서

나오신 것 같은 어르신들이 많네요.

매표소입니다.

영주 부석사 안내도

아무리 찾아봐도 이 안내도만큼

좋은것은 없는것 같네요...

다만 천왕문과 삼층석탑(동탑과 서탑)사이에

새 건물이 들어선 것은 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어른 1200원.

입장료 내고 볼만한

그만한 가치는 있습니다.

아 참... 밑에 주차장 들어올 때도

주차비가 있기는 합니다...

승용차 기준 3000원.

안내문에 따르면 영주 부석사는

소백산 국립공원에 속해 있으나

태백산맥지역에 해당한다는 말이군요.

한낮 뙤약볕이 장난이 아니군요...

은행나무길입니다.

일주문 바로 앞에서

취나물을 파는 할머니를 또 만났는데

진짜 한국산이긴 할텐데...

살 마음의 여유가 없네요...

일주문 (一柱門)

처음 맞이하는 일주문입니다.

일주문 (一柱門)

보통 큰 사찰을 들어면 세 번의 문을 지나게 되는데
이것을 사찰의 삼문(三門)이라 합니다.


일반적으로 처음이 일주문 (一柱門),
그 다음이 금강문(金剛門)이나 천왕문(天王門),
그리고 마지막이 불이문(不二門) 혹은 해탈문(解脫門)이다.
사찰의 문은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일주문 (一柱門)

기둥에 금강역사상이 그려져 있습니다

 

일주문 (一柱門)
사찰에 들어서는 첫 번째 문.
기둥이 한 줄로 되어 있는 데서 유래된 말이다.
네 기둥[四柱]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을 얹는

일반적인 문의 형태와는 달리
일직선상의 두 기둥 위에 지붕을 얹는

특한 형식을 갖추고 있다.
사찰에 들어가는 첫 번째 문을

독특한 양식으로 세운 것은
일심(一心)을 상징하는 것이다.
즉, 사찰 금당(金堂)에 안치된

부처의 경지를 향하여 나아가는 수행자는
먼저 지극한 일심으로 부처나 진리를 생각하며
이 문을 통과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일주문 [一柱門] (두산백과)

길가에 핀 야생화

이거 뭔지 모르겠네요...

당간지주 (보물 제255호)
이 당간지주는 부석사 창건 당시 세워진

신라시대의 석조 유물이다.

1300여년전의 이 당간지주에는

화엄종찰을 알리는 깃대와 깃발이 꽂혀 있었겠지만

지금은 한쌍의 돌기둥만이 남아 있다.

당간지주 (보물 제255호)

당간지주는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에 다다르기 전

왼편 중턱에 우뚝서 있으며,

그 키가 4.8m 이다.

헐~ 멋지게 세웠네...

천왕문(天王門)

천왕문 앞  계단이 첫 번째 석축인데

높이가 2.7m입니다.

천왕문까지를 하품으로 봅니다.

 

천왕문(天王門)
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四天王)이 안치된 전각.
사천왕은 고대 인도종교에서 숭앙하였던

귀신들의 왕이었으나
석가모니에게 귀의하여

부처와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천왕상들은 불거져나온 부릅뜬 눈,

치켜올려진 검은 눈썹,
크게 벌린 입 등 두려움을 주는 얼굴에,
갑옷을 걸치고 큰 칼을 들고 있으며

마귀를 밟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남쪽을 지키는 증장천왕(增長天王)
붉은빛을 띤 몸에 화난 듯한 눈을 가지고 있다.
오른손에는 용을 움켜쥐고 있으며
왼손에는 용의 입에서 빼낸 여의주를 쥐고 있다.

동쪽을 지키는 지국천왕(持國天王)
온몸에 동방을 나타내는

오행색(五行色)인 청색을 띠고 있으며,
왼손에는 칼을 쥐고 오른손은 주먹을 쥐어

허리에 대고 있거나
손바닥 위에 보석을 올려놓은

모습을 하고 있다.

북쪽을 지키는 다문천왕(多聞天王)

 검은빛을 띠며
비파를 잡고 줄을 튕기는 모습을 하고 있다.

서쪽을 지키는 광목천왕(廣目天王)

은 몸이 흰빛이며
웅변으로 나쁜 이야기를 물리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입을 벌리고 있다.
붉은 관을 쓰고 갑옷을 입었으며

삼지창보탑을 들고 있다.

 

천왕문은 사찰을 지키고 악귀를 내쫓아
청정도량(淸淨道場)을 만들고

사람들의 마음을 엄숙하게 하여,
사찰이 신성한 곳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기 위하여 세워졌다.


그러나 가장 큰 의미는
수행자의 마음 속에 깃든 번뇌와 좌절을 없애
한마음으로 정진할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금강문 [金剛門] (두산백과)

새로 세워진 건물인듯...

예전에 왔을때는 없었습니다.

 

저 멀리 범종각이 보이네요.

중간에 웬 아가씨가...

아하... 셀카중이셨군...

경사진 곳에 석축을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짓는것이 보통 일은 아닌 듯...

안내도에 보면 이곳은 예전에

석축만 계단만 있던 자리군요.

동탑

새로 지은 건물을 지나면

삼층석탑(동탑, 서탑)과

샘물이 있는 곳이 나옵니다.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되었다는

동탑과 서탑중 동탑

 

이 탑들은 원래 부석사 동쪽 일명사터에 있던 것을

1966년 경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온 것입니다.

서탑

이 서탑에는 익산 왕궁리 5층탑에서 가져온

석존사리 5과가 분안되어 있다고 전해진다네요.

부석사 범종루

범종을 달아 놓은 전각을 말하는데 

절에 따라 범종루·종각·종루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단층일 경우 각(閣)이라 하고

중층일 경우 루(樓)라고 합니다.

올라갈 때는 중층으로 보이니 범종루라고 합니다. 

 

천왕문에서 범종루까지를  중품으로 봅니다.

영주 부석사 홈페이지에서도

범종루라고 했다가 범종각이라고 하니

일관성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뒤에서 보면 단층으로 보이니

범종각이라고 합니다.

 

홈페이지의 설명에 따르면...

『범종각은 그 건물의 방향이 여느 건물과는

달리 측면으로 앉아있다.

건물의 지붕은 한쪽은 맞배지붕을 하고 있고

다른 한쪽은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팔작지붕을 한 쪽이 정면을 향하고 있고

맞배지붕이 뒤쪽을 향하고 있는데  

 부석사가 소백산맥을 향하여

날아갈 듯이 앉아있는데

범종각이 정면을 향하고 있으면

건물이 전반적으로 무거워보인다.

 

따라서 범종각을 옆으로 앉혀놓고

뒷쪽을 맞배로 처리하여

건물이 전반적으로 비상하는 느낌을 주고

답답해 보이지 않아 좋다.』라고 소개하고 있네요.

범종루의 하단부의 두툼한 기둥

하단부에서 바라본 천정

하단부를 지나서 위쪽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옵니다.

계단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두툼한, 갈라진 나무 기둥을 보니

오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있군요.

목어와 법고중  목어[ 木魚 ]

범종각인데 종각은 없고

목어와 법고만 있습니다.

종각은 그 옆에 따로 있습니다.

 

불교에서 쓰이는 중요한 기구 네 가지를

법구사물(法具四物)이라고 부르는데

범종·목어·법고·운판 그것입니다.

 

나무를 깎아 잉어 모양으로 만들고

속을 파 내고 그 속을 두드려

소리를 내는 불구(佛具)인 목어[ 木魚 ]

 

본래 중국의 선원(禪院)에서

아침에는 죽을 먹고 점심에는 밥을 먹었는데,

그 때마다 때를 알리는 신호기구로 쓰였던 것이다.

법고(法鼓)

각종 불교 의식에 쓰이는 북을 법고(法鼓)라고 한다.

말 그대로 법을 전하는 북으로,

특히 축생들에게 전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보통 법고는 종각에 두고 아침 저녁으로 치지만

이것은 홍고(弘鼓) 또는 대고(大鼓)라 하며,

염불 때 사용하는 법고는 소고(小鼓)라고 한다.

 

법고의 몸통은 잘 건조된 나무로 만들고

두드리는 양면은 소가죽으로 만든다.

한쪽은 수소, 다른 쪽은 암소의 가죽을 대야

좋은 소리가 난다고 한다.

북소리도 음양의 조화가 잘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몸체에는 용을 그리거나 조각을 하고,

두드리는 부분에는 ‘만(卍)’자를

태극 모양으로 둥글게 그리기도 하며,

부처의 깨달음이나 서원을 적은

진언(眞言)을 새기기도 한다.

샘물

샘물의 맑은 물...

시원해 보이죠?

부석사 안양문(안양루)

부석사(浮石寺)의 주요 전각인

무량수전(無量壽殿, 국보 제18호) 맞은편에 있는 누각으로,

2단으로 쌓은 높은 석축 위에 세워진

정면 3칸·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입니다.

 

누 밑을 통과하여 무량수전으로 들어서게 되어 있어

일종의 누문(樓門) 역할도 하는데

전면에서 보면 2층 누각이지만,

무량수전 쪽에서 보면 단층 전각처럼 보입니다.

 

안양루가 있는 대석단은 2단으로 높이가 4m이고

계단이 25단이나 되지요.

범종루에서 안양루 누각 아래까지를  상품으로 봅니다.

올라가는 쪽에는 안양문이라고 적혀 있고

뒷편에는 안양루라고 적혀 있습니다.

 

하나의 건물에 누각과 문이라는

이중의 기능이 부여 되어 있어

건물 전면에는 ‘안양루’, 뒷면에는 ‘안양문’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안양(安養)’이란 극락 하는 말로,

안양문은 극락에 이르는 입구를 상징하고,

안양문을 지나면 나오는 무량수전은 극락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안양루를 거쳐 무량수전까지를 극락으로 봅니다

부석사 무량수전 국보 18호

부석사 무량수전은 부석사(浮石寺)의 본전(本殿)으로서

676년(신라 문무왕 16)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왕명을 받들어 창건하였습니다.

그후 몇 번의 중창(重創)이 있었고,

조선 광해군(光海君:1608∼1623) 때

단청(丹靑)을 하였다고합니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8호지정되었습니다.

정면 5칸, 측면 3칸, 단층 팔작지붕 주심포계 건물로

추녀의 네 귀를 8각 활주로 받쳐주고 있습니다.

이 현판은 고려 공민왕의 글씨이고

아미타여래를 모신 전각이라서

무량수전이라 하는데

 아미타여래는 서방극락을 주재하며

끝없는 지혜와 무한한 생명을 지닌 분으로

다른 말로 무량수불이라고도 합니다.

배흘림기둥과 들어올린 창문

기둥 높이의 3분의 1 지점이 제일 굵고

위는 아래보다 더 가늘게 하는 것이 보통인데

기둥에 배흘림을 두는 것은 구조상의 안정과

착시현상(錯視現象)을 교정하기 위한

심미적인 착상에서 나온 수법입니다.

 

배흘림기둥은 그리스의 신전(神殿) 건축에서도

발견할 수 있으며, 중국이나 일본의 건축에서도

고대에는 흔히 사용하였다.

 

그러나 배흘림기둥을 꾸준히 사용해 온 것은

한국 건축물이다.

한국에서는 고구려의 고분 벽화에

이미 기둥의 배흘림이 뚜렷이 나타나며

고려시대의 대표적 건물인

부석사 무량수전(浮石寺無量壽殿)을

비롯하여 조선시대의 많은 건물,

즉 무위사극락전(無爲寺極樂殿)

·화엄사 대웅전(華嚴寺大雄殿) 등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배흘림기둥 (두산백과)

건물 모서리 기둥의 귀솟음

 배흘림기둥 이란 기둥의 아래쪽 ⅓이 

가장 불룩하게 배가 불러 보이게 한 것을 말하고

귀솟음은 건물 모서리 기둥을

중앙보다 좀 더 높인 것을 말합니다.

이는 모두 사람의 착시를 교정하고

시각적인 안정감을 주려는 보정 작용들입니다. 

소조아미타여래좌상 (국보 제45호)

무량수전 안에는

국보 제45호인 소조아미타여래좌상을 모시고 있는데,

무량수전의 건물이 남향(南向)인데 비해

이 불상만 동향(東向)인 점이 특이합니다.

소조아미타여래좌상 (국보 제45호)

흙을 빚어 만든 소조상으로

2.78m의 아미타여래좌상이

금단청을 하고 앉았습니다.

굵은 옷주름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려서

석굴암 본존불과 흡사한 균형미를 갖추고 있어요.

불꽃이 치솟아 오르는 듯한 힘이 느껴지는

광배는 나무로 되어 있는데

불상과 같은 금단청이 되어있고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는 모습입니다.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17)

 부석사 무량수전 앞에 세워져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화강석 석등으로

국보 17호 입니다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팔각석등으로

상하 비례의 교묘함이나 조각의 정교함에서

신라시대 석등 중에서도 손꼽히는 걸작입니다

3층석탑(보물 제249호)

무량수전의 동쪽 약간 높은 지대에 위치한

신라시대의 3층 석탑이다.

이 탑은 자인당의 석불들과 함께

이웃 절터에서 옮겨진 것이다.

2층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쌓은

전형적인 신라시대 석탑이다.

 

삼층석탑은 부석사 창건 당시 조성된 것으로

높이가 5.26m, 기단폭이 3.56m 이다.

무량수전에서 바라다 본 안양루

올라가는 쪽에는 안양문이라고 적혀 있고

뒷편에는 안양루라고 적혀 있습니다.

안양루 옆이 뷰 포인트(View Point)입니다.

안양루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엎드려 모여 있는 경내 여러 건물들의 지붕과

멀리 펼쳐진 소백의 연봉들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부석사 전체에서 가장 뛰어난 경관입니다.

그래서 예부터 많은 문인들이

안양루에서 바라보는 소백의 장관을 시문으로 남겼고

그 현판들이 누각 내부에 걸려 있다고 합니다.

부석(浮石)

부석사 뒷편에 부석이란 큰바위가 있습니다

이 바위는 아래의 바위와 서로 붙지 않고 떠 있어

뜬돌이라 부석이라 이름붙여졌는데

떠 있는 느낌이 들지를 않네요.

 

이 부석에 관해 내려오는 전설이 있는데 좀 길지만

부석사에 대한 이해를 도울수 있고 재미도 있어 올려봅니다 

 

[ 부석의 전설 ]
≪삼국유사≫에 이 절의 창건설화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 당나라로 불교를 배우기 위하여 신라를 떠난 의상

상선(商船)을 타고 등주(登州) 해안에 도착하였는데,

그곳에서 어느 신도의 집에 며칠을 머무르게 되었다.

 

그 집의 딸 선묘(善妙)는 의상을 사모하여

결혼을 청하였으나,

의상은 오히려 선묘를 감화시켜

보리심(菩提心)을 발하게 하였다.

 

선묘는 그때 “영원히 스님의 제자가 되어

스님의 공부와 교화와 불사(佛事)를 성취하는 데

도움이 되어드리겠다.”는 원을 세웠다.

 

 의상은 종남산(終南山)에 있는 지엄(智儼)을 찾아가서

화엄학을 공부하였다.

그 뒤 귀국하는 길에 의상은 다시 선묘의 집을 찾아

그 동안 베풀어준 편의에 감사를 표하고

뱃길이 바빠 곧바로 배에 올랐다.

 

선묘는 의상에게 전하고자 준비해 두었던

법복(法服)과 집기(什器) 등을 넣은 상자를

전하기도 전에 의상이 떠나버렸으므로,

급히 상자를 가지고 선창으로 달려갔으나

배는 이미 떠나가고 있었다.

 

선묘는 의상에게 공양하려는 지극한 정성으로

저만큼 떠나가는 배를 향해

기물상자를 던져 의상에게 전하고는,

다시 서원(誓願)을 세워 몸을 바다에 던져

의상이 탄 배를 보호하는 용이 되었다.

용으로 변한 선묘는 의상이 신라에 도착한 뒤에도

줄곧 옹호하고 다녔다.

 

의상이 화엄의 대교(大敎)를 펼 수 있는 땅을 찾아

봉황산에 이르렀으나 도둑의 무리 500명이

그 땅에 살고 있었다.

용은 커다란 바위로 변하여 공중에 떠서

도둑의 무리를 위협함으로써

그들을 모두 몰아내고 절을 창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의상은 용이 바위로 변하여서

절을 지을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해서

절 이름을 부석사로 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부석사의 무량수전(無量壽殿) 뒤에는

부석(浮石)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가 선묘용이 변화했던 바위라고 전한다. 』

 

그럴듯 한가요?

삼성각쪽으로 내려가는 길

외부에 석가여래좌상이 있네요

석가여래좌상앞에 놓여 있는 동자승 인형

삼성각
칠성, 독성, 산신 세 분을 한 곳에 모신 전각으로

무량수전 서쪽 석축 아래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삼성각은 우리나라 재래의

수(壽), 복(福), 재(財)의 삼신 신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합니다.


현재의 삼성각은 원래 축화전(祝花殿)이라 불렀는데

영조 때 대비의 원당으로 지은 건물이라 합니다.

1979년의 부수 때까지는 원각전(圓角殿)이라 하였고

목조 아미타여래 좌상을 모셨었다.

길의 경계를 나즈막한 담위에

기와를 얹었네요.

푸르름 속에 솟아난 기와지붕들

부석사 종각

 

불교에서 쓰이는 중요한 기구 네 가지인

 법구사물(法具四物)중에서

가장 규모가 커서 특별히 종각이라는 건물을 지어

매달아놓은 것이 범종이다. 부석사 종각

 

종은 대개 아침 저녁으로 108번씩 친다.

이것은 백팔번뇌를 타파하고 무간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의 고통을 덜어준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28번 타종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는 불교의 세계를 의미한다.

 종의 입구가 땅 밑을 향하고 있는 것은

종소리가 지옥으로 울려퍼지라는 뜻이기도 하다.

단청이 아름답네요.

이걸 그리는 것도 정말 웬만한 끈기가 없으면 안될듯...

부석사 종각

여긴 또 범종각이라고 적혀있네요.

목어와 법고가 있는 범종각

종이 있는 종각...

근데 두군데 다 범종각이라고 사용하면...?

헷갈리네요...

종 위에 용이 앉아있네요

 매월 1월1일 타종행사를 하며,

시골집까지 소리가 들린대요.

예전 종각의 사진입니다.

이제 다시 내려가는 길...

되돌아서서 범종각을 바라봅니다.

다시 올 날이 있을런지...

새로 생긴 건물을 따라...

이 석축들은 부석사를 창건할 당시 비

탈을 깎고 평지를 고르면서 만든 것이다.

물론 석축의 목적은 사찰을 짓기 위한 땅다짐에 있지만

석축 돌계단 그 자체에도 상징 하는바가 있다는데.

즉, 극락에 이를 수 있는 16가지 방법 중

마지막 세 방법인 3품 3배관의

9품 만다라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합니다.
 

천왕문에서 요사체로 오르는 세 계단이 하품단이며,

여기서 다시 세 계단 오른 범종루까지가 중품단,

범종루에서 세 계단을 올라 안양루 밑을 지나

무량수전 앞 마당에 다다르는데,

마지막 계단으로 상품단이다.

이렇게 부석사를 찾는 이는

상징화된 돌계단과 석축을 지나면서

극락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또 하나 눈에 띄는 점은

반듯하게 다듬은 규격화된 돌들로 석축을 쌓지 않고,

돌의 자연 생김새를 그대로 이용해

잘 짜맞추어 쌓았다 는 것이다.

둥글든 모났든 크든 작든 돌들의

본래 모양새와 개성을 버리지 않고도

조화롭고 짜임새 있으며 견고한 석축이

완성되었다는 사실은 현대의 우리들에게 커다란 가르침을 준다.

마주친 산딸기

시원한 은행나무길을 걸으며...

이렇게 쌓인 돌들마냥

빌었던 그 많은 소원들이

차곡차곡 쌓아졌을까?

경복의 천년고찰

영주 부석사 잊지말고 찾아가보세요...

시원한 물줄기마냥

영주 부석사의 시원함 맛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