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숲 맑은 샘/큰숲 구약성경개관

느헤미야 14장

안산차도리 2009. 7. 6. 10:46

■ 느헤미야 14장

 

'옛날 옛적에'라는 도입과 함께 시작되는 동화들은 대부분 주인공이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내용

으로 끝을 맺는다. 줄거리에 나오는 역경이 그들이 겪은 처음이자 마지막 불행인양 말이다.

그러나 인생의 현실은 결코 그렇지 않다.

100퍼센트 완벽한 완성도, 역경이 없는 행복한 결말도 존재하지 않는다.

느헤미야서의 마지막 부분은 이 점을 정확히 보여준다.

느헤미야의 예루살렘 성벽 재건 및 공동체 갱신은 눈부셨다.

당대 패권을 쥐었던 페르시아 왕의 재가를 당당히 얻어 온갖 역경과 외세의 위협을 극복하며 일궈낸 역사

였다. 그러했기에 성공적인 유다 공동체의 재건이 영구히 유지되길 소망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과 개입에 의해 이루어진 역사였기에 더욱 그러했다.

최소한 느헤미야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라도 새 역사의 기개가 이어지리라 기대했을 법하다.

(여호수아나 다윗왕, 솔로몬 왕등의 사례를 보아도 그들이 살아 있느느 동안 이스라엘 공동체의 건강도가

 일정 수준 유지되었던 것을 고려할 때 최소한 이정도는 기대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유다 공동체의 퇴락 속도는 KTX를 추월한다.

느헤미야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페르시아에 다녀오느라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유다 공동체는 타락해갔다.

느헤미야의 믿음과 지도력은 그의 눈 앞에서 이미 허물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느헤미야 13장은 또 다시 개혁에 박차를 가하는 느헤미야의 모습과 함께 미완성으로 끝난다.

이후 유다 공동체의 회복과 개혁의 성공률은 미지수로 남겨진채,

팔을 걷어붙이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듯한 태도로 개혁에 착수하는 느헤미야의 기도,

"‥‥"와 함께 끝나고 있다.

 

어쩌면 하나님의 뜻을 인간의 손을 통해 실천했다는 이유로 인간이 당면한 문제를 반영구적으로 해결할

것이라는 기대는 비현실적이라 하겠다. 분명 느헤미야의 노력은 성과가 있었다.

하나님의 뜻이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개입도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헤미야서의 유다 공동체 회복은 결코 완전하지 않으며 13장이 보여주듯 끊임없는

개혁과 변화를 필요로 했다.

 

그래서 느헤미야서는 오늘은 사는 우리에게 위로가 된다.

믿음의 영웅 느헤미야가 유다 공동체의 개혁을 완벽하고 영구적인 것으로 일구었다면, 우리는 도무지

그를 따라할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느헤미야가 실패 앞에 좌절하고도 포기하지 않고 개혁과 변화의 땀을 다시 흘렸기에

우리도 한술 밥에 배부르길 바라지 않을 수 있다.

분명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병든 곳을 고치시며 허물어진 벽을 세우시며 타락한 곳을 개혁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이 개혁하셔서 우리를 통해 일을 이루신다. 거기에 진정한 변화와 회복이 찾아든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기에 모든 것이 완성되는 마지막 때가 되기 전에는 그 어떤 것도 완벽하지 않기에,

이 순간 경험하고 있는 변화와 회복을 완전한 것이라고 판단하며 자만해서는 안된다.

이루어진 회복과 개선이 얼마든지 다시 허물어지거나 퇴보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최종적이거나 최고의 것이라는 교만은 버려야 한다.

지금까지는 잘했지만 얼마든지 부작용이나 실패의 여지가 있을 것을 염두에 두고 겸손한 자세를 취하여

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까지 붙잡고 소위 '전통화' 시킨 방식이라도 결코 완벽한 것이 아니기에 겸손하게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

오늘의 상황에 필요한 새로운 삶의 방식을 회복과 변화와 영적 부흥을 위해 겸손하게 선택할 수도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해야만 느헤미야가 허물어진 유다 공동체 앞에서 낙심하는 대신 다시 개혁의 역사 안으로 주저

하지 않고 뛰어들었듯이,

오늘 우리도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허물어지는 자신 앞에서 낙심하지 않고

다시 회개와 회복과 변화의 역사로 헌신할 수 있다.

마지막에 완성 시키실 예수님이 반드시 때가 되면 이루시리라는 굳건한 소망과 믿음을 붙잡고 말이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통해 느헤미야 14장이 계속 기록되는 것이다.

 

큰숲 맑은 샘 2009년 6월호  이달의 말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