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숲 맑은 샘/성경속의 여인들

시아버지와 동침한 다말

안산차도리 2009. 3. 6. 11:54

시아버지와 동침한 다말

남편 잡아먹은 여자
이렇게 원통한 일이 있을까요.

시집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남편이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도 기가 막힙니다.

하나님 잘 섬기기로 유명한 유다집안의 장남인 엘과 결혼했는데

글쎄 그 남편이라는 사람이 하나님께 큰 죄를 짓고 죽임을 당했다는 겁니다.

다말은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입니다.

갑작스런 남편의 죽음에 슬픈 것도 슬픈것이지만, 주변의 시선이 따가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원래 안 그런 사람이었는데, 여자가 얼마나 내조를 못 했으면 남자가 그랬겠어.

모두들 수근수근 거리는 것 같아 귀가 간질간질 했지요. 참으로 억울한 일입니다.

평상시에 나무랄데 없이 남편을  섬기면 됐지,

시시각각 따라다니며 죄를 짓는 것까지 감시할 수는 없으니까요.

더 걱정인 것은 다말과 남편 사이에는 아이가 없습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처럼 그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에게도 장자는 아들 이상의 존재였습니다.

집안의 대를 이어야하는 의무가 있었고, 장자에게만 상속권이 주어지기도 했지요.

남편 잡아먹은 여자라고 손가락질 받는 것도 기가 막히지만, 한 집안의 대가 끊겼다는 것은 남겨진 큰 며느리

입장에서는 큰 부담으로 다가왔습니다.


아들을 낳기 위한 전격타결!
당시의 이스라엘 관혼 법에는 장자가 자녀를 낳지 못하고 죽게 될 경우 차남이 장자의 형수를 책임져야

는 법이 있었습니다.

천법인지 악법인지 잘 모르겠지만 다말에게는 기사회생제도처럼 반갑게 들렸습니다

유다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아들인 오난과 서둘러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하지만 오난은 자신의 자녀가 죽은 형의 자녀가 되는 것이 마음에 걸려 형수인 다말과 동침을 하지 않았지요.

이것이 또 화근이 되어 차남인 오난도 죽음에 이릅니다.
다말도 참으로 기구한 운명입니다.

도대체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결혼하는 남자들마다 하나같이 이렇게 하루살이 목숨이란 말입니까.

다말은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입니다. 

다말은 시아버지 유다와 전격 타결을 맺었습니다.

마지막 남은 막내아들 셀라가 성장하면 다말과 동침하기로 말입니다.

아직 얼굴에 솜털이 보송보송한 막내 도련님을 세번째 남편으로 맞아야하는 자신의 인생이 기가 막혔지만

별 뾰족한 수도 없었습니다.
한편, 막내아들 셀라는 두려워졌습니다.

아직 어리기만 한데 형수라 부르던 여인과 결혼해야 하는 것도 싫었고,

또 형들처럼 자신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시아버지인 유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대를 잇기 위해 며느리와 전격타결까지 맺었으나 하나 남은 막내아들까지 목숨을 잃게 되면

유다집안의 아들은 모두 죽은 셈이니 그 맘도 이해는 됩니다.

하지만 이제 다말은 점점 의무감에서 책임감으로 변했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신실한 다말은 왜 하나님께서 이 일에 집착하시는지 자신도 역시

하나님의 시선에 집중해야함을 깨달았습니다.

이제는 시아버지 유다가아닌 하나님과 전격타결을 맺을 결심을 합니다.


이유 있는 근친상간
한 여인이 에나임 성문 앞에서 창녀의 옷을 입고 유다를 매혹적인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눈을 제외하곤 얼굴이 가려져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몸을 파는 창녀치고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 여인입니다.

유다는 그여인과 함께 하룻밤을 보내고, 여인의 요구한 염소새끼 대신 도장과 약조물을 맡겨놓고 헤어졌습니다.

친구를 보내어 맡겨놓은 물건을 찾으러 갔지만, 여인은 말도 없이 온데 간데 사라지고 없었지요.

앗싸! 염소새끼 한마리 굳었다. 싶어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유다였습니다.
그렇게 유다가 별다른 문제없이 배부르고 등 따스운 생활을 유지하던 어느 날.

며느리인 다말의 배가 불러오고 있다는 소문이 들리는 게 아닙니까.

유다는 노발대발하여 행실이 바르지 못한 며느리를 불에 태워 죽여 버리라고 했지요.

죽기 전에 시아버지께 꼭 전할 것이 있다고 사정하여 찾아온 다말은 유다 앞에 도장과 약조물을 꺼내어

놓습니다.
바로 몇 달 전에 만났던 창녀가 자신의 며느리인 다말이었던 것이지요.
대를 잇는 것은 반드시 다말의 의무는 아닙니다.

그러나 창녀행세를 하며 시아버지와 동침하면서까지 대를 이으려 했던 것은 단지 자신이 속한 한 집안의 몰락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자신을 통해 예수님의 계보가 이어질 거라는 것을 몰랐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자로서의 부끄러움을 감수하면서까지 계보를 이어나가는 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임을

알았습니다.

세상의 기준에서 보면 참으로 복 없는 여인인 다말.

그러나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로 자신도 모르게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큰숲 맑은 샘  2008년 11월호에서  발췌하였습니다.   글쓴이 이수영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