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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춧가루와 아버지

안산차도리 2012. 6. 12. 14:24

고춧가루와 아버지

 

이응도(미국)

 

저는 어제 한 장례식에 참여했습니다. 미국에 와서 만난 참 귀한 분이었습니다.

10년 가까이 암으로 투병하셨는데, 3일 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곳이 뉴욕 플러싱이라 좀 멀기는 했지만 함께 슬픔과 위로를 나누고

싶어서 다녀왔습니다.


3남 2녀, 자녀들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나눴습니다.

자녀들에게 참 따뜻하고 좋은 아버지셨고, 삶에 좋은 본을 보이셨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둘째 아들이 이런 이야기 하나를 나누었습니다.


약 10년 쯤 전이었습니다.

하루는 운동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보니 아버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오늘 저녁 먹을 사람이 너와 나 둘 뿐이니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는 게

어떠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까운 식당에 가서 두 사람은 대구탕을 먹었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아버지와 단 둘이서 하는 식사였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하껄껄 웃으면서 정답게 대화했고, 좋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집으로 돌아와서 씻기 위해 거울 앞에 선 아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자신의 앞니에 그야말로 대문짝만한 고춧가루가 끼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버지와 식사를 하면서 얼마나 많이 웃어댔는데, 아버지는 자신의 앞니 사이에

고춧가루가 끼어 있는 것을 보았으면서도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고, 자신은 그것도

모른 채 입을 있는 대로 벌려서 웃고 또 웃었다고 생각하니 너무 부끄럽고 화가

났습니다.


그는 쿵쾅거리며 아버지께로 갔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따졌습니다.

“아빠, 왜 내 이에 고춧가루가 끼었다는 말을 안 해줬어요? 사람들이 보면서 얼마나

웃었겠어요. 아빠도 막 비웃으면서 이야기했잖아요.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어요?

내가 얼마나 부끄러운지 아세요?”


속사포처럼 따지는 그를 아버지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그저 보고 있었습니다.

“무슨 말이라도 해보세요. 왜 나를 놀렸어요? 왜 나를 부끄럽게 해요?”


너무 분해서 눈물까지 글썽이던 그에게 아버지께서 낮은 음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나는 그냥 너와 이야기하는 것이 좋았단다. 나도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는데,

내 눈에는 고춧가루가 안 보였다. 나는 너만 보였단다. 내가 고춧가루를 보지 못해서

미안하다.”

 

 

그때는 아버지의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눈에는 정말 대문짝만하게 보이는 고춧가루가 왜 아버지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을까… 그는 아버지가 변명을 한다고 생각을 했고, 여전히 화가 났고,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이제 그는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렸습니다.

사랑스러운 아들과 딸이 생겼습니다.

말 그대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스러운 자녀들을 보면서 그는 얼마 전

고춧가루를 떠올렸다고 했습니다. 비로소 아버지의 말씀이 이해되었습니다.

‘그래, 그래. 그때 아버지 눈에는 정말 고춧가루가 보이지 않았을지도 몰라.

아버지는 정말 나와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야.

나와의 대화 시간이 너무 좋았던 거야.

아니, 아버지에게 있어서 나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사랑스러운 아들이었던 거야.

어떤 결점도, 어떤 잘못도 보이지 않았던 거야.’


그는 아버지가 되어서야 자신의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는다는 말이 실감난다고 했습

니다. 그리고 자신의 약점, 나쁜 점을 보지 않으시고 늘 칭찬해주시고 사랑해주셨던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고춧가루가 아니라 그 어떤 결점도 자신을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눈에는 더욱 사랑해야 할 이유이자 대상일 뿐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제자들, 아마도 참 자신들이 밉고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참 못나고 비겁했던 자신들을 돌아보며 다들 숨고 도망쳤습니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에게 가장 편하고 익숙했던 환경으로 돌아갑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에 그들은 어부였는데,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그들은 다시 바다로

돌아간 것입니다.

‘사람 낚는 어부’의 비전으로 갈릴리 바다를 떠났는데, 다시 바다에 그물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들이 얼마나 비겁하게, 얼마나 매몰차게, 얼마나 두려움에 가득 차서 주님을 버렸

는지 따지고자 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징계하고자 함도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그들의 연약함을 알지 못해서 그들을 선택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모든 연약함과 비겁함을 아셨지만 그것보다 그들을 향한 주님의 사랑과 뜻이

더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은 다시 그들을 만나 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사랑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를 사랑한단다. 너희도 나를 사랑하느냐?

나를 사랑한다면 나의 사랑을 의심하지 말아라.

나의 사랑으로 들어오기를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는 여전히 나의 사랑, 나의 제자들이니까.

너희의 어떤 연약함도 너희에 대한 나의 사랑을 막지 못하니까.”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생각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합니다.

우리의 어떤 연약함도, 우리의 어떤 수치도 그 사랑을 막을 수 없고, 그 사랑을 거역

할 수 없습니다.

더욱 큰 사랑, 더욱 깊은 사랑- 그 사랑에 의지해서 오늘도 주님 앞에 섭니다.

그 발 앞에 엎드립니다. ♣

 

교역자 / 미국 필라델피아 초대교회,
인터넷 갈릴리마을 가족. 필명: 가일아빠
월간 해와달 2012년 5월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