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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4~♥

안산차도리 2010. 4. 22. 21:30

1004

 

김현주

 

해마다 그렇듯이, 결혼과 함께 아이들이 태어난 이후 작년도 줄곧 매우 바쁜 한해였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아이들과 남편 도시락을 싸고, 7시30분에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데려다준 후,

7시45분까지 학교에 출근을 하고, 밤 10시 늦은 시간까지 근무를 해야 했습니다.

피곤에 찌든 몸과 마음을 겨우겨우 하루씩 지탱하며 나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데,

간간히 아이들을 돌보는데 지친 할머니의 불평과 투정을 들으며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마쳐야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항상 어디에 있든지 간에 저의 모든 에너지가 4살, 6살 두 아이들에게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직장인 학교도, 그리고, 자연히 내가 담임인 반 아이들에게까지도

소홀해졌습니다.

당시 내가 맡은 아이들은 고(高)3 여학생들이라 스스로 잘 알아서 하긴 하지만,

제 성격이 워낙 한 소심 하는데다가 꼼꼼한 A형이다 보니,

반 아이들에게 다른 담임선생님들처럼 잘 해주지 못한다는 생각에 마음 한구석에는

항상 학생들에 대한 미안함이 남겨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반이 절대로 다른 반에 뒤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우리 반에 관한

어떠한 작은 이야기에도 민감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특별히 아이들이 떠들거나 성적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저에게 어느 날 오후, 당시 저희반의 이른바 모범생 두 명이 건의할 것이 있다며

찾아왔습니다.

그 아이들은 선생님의 복잡한 마음은 눈치 채지 못한 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선생님, 정희(가명)가 너무 많이 떠들어요.

게다가 얼마나 목소리가 큰지 자습시간에 공부할 수가 없어요. 정희를 어떻게 해주세요.

그렇게 하다가 우리 반 애들 전부다 공부도 못하고, 모의고사도 망칠 것 같아서 속상해요.”

 

정희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와 단 둘이 사는 아이였습니다.

얼굴도 예쁘고 표정도 밝고 상냥한 모습이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한곳에는 어두움이 보이는

아이었습니다.

정희는 제가 담임을 맡고 난 이후부터 줄곧 불순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야간자율학습 도망가기, 도망 안 가고 남아있으면 떠들기, 자습시간에 몰래 매점 다녀오기

등등… 안 그래도 반 관리에 민감한 저에게 정희는 일부러 담임선생의 마음에 안 들고 눈에

거슬리는 행동만을 골라서 하는 듯 했습니다.

게다가, 정희는 반에서뿐만 아니라 전교에서도 거의 바닥의 성적을 유지하였기에, 우리 반의

평균등수를 늘 꼴찌로 만드는 일등공신이었습니다.

그런 정희를 계속 용서했지만, 결국은 이런 ‘사태’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아무튼 모범생 아이들에게서 그 말을 듣는 순간, 속이 확 뒤집혀졌습니다.

‘내가 그렇게 타일렀건만 정희가 또 떠들었던 말이야?’하는 생각에 정희에 대한 괘씸함이 확

찾아왔습니다. ‘정희 이 녀석을 가만두지 않을 테다.’

정희에게 가장 큰 벌을 내리기로 결심한 저는 과연 어떠한 벌을 내려야할지 고민하다가,

제 생각에 가장 나쁜 벌을 선택했습니다.

일단 정희를 불렀습니다.

정희는 담임선생님의 비장한 표정과 목소리를 듣고, 벌써부터 주눅이 팍! 들어있는 모습입니다.

 

“정희야, 네가 많이 떠드는 것 알고 있지? (정희는 고개를 숙인 채 끄덕거립니다)

내가 얼마나 많이 네게 말했었니? 그런데 이제는 안 되겠다. 너를 봐줄 만큼 봐줬는데, 너는

계속해서 나를 실망시켰어. 이제 나는 널 포기했다. 이제 자습시간에는 집에 가거라.

그리고 네가 알아서 네 마음대로 공부하렴! 지금 가방 챙겨서 집으로 가거라!!!”

 

정희는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저의 말에 뭐라고 변명하려는 듯 입술을 약간 움직이다가

그냥 포기해버리고, 굵은 눈물방울만 뚝뚝 떨어뜨립니다.

저는 그런 정희를 보고 측은하다는 생각보다, 힘든 상황에 있는 나를, 위로받고 이해받아야

하는 상황에 있는 나를 하나도 이해해주지 않는 아이라는 생각에 오히려 너무나 미웠습니다.

그 말을 듣자 정희는 담임인 저와 조용히 자습 잘하는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수치스럽게 가방을

들고 교실을 나가야했습니다. 눈물을 훔치며, 코를 훌쩍훌쩍거리며, 많이 울어서 벌써부터 퉁퉁

부어 빨개진 눈을 하고는 말입니다.

그런 정희의 모습을 보며, 저는 저 자신을 합리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어쩔 수 없었어, 이것이 최선책이야, 다른 아이들을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었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정희만 없었으면 우리 반이 정말 조용하게 자습 잘 하고 전교에서 1등을

할 수 있을 텐데… 정희만 없으면… 정희만 없으면…’

저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아주 사악하고 나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정희는 우리 반 야간 자습시간에서 ‘강퇴’를 당하였고, 정희가 없는 자율학습시간은

정말로 조용히 잘 돌아갔습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가장 약하고 여린 한 영혼을, 단지 잘 따라오지 못한다는 이유로, 약간의 성가심이 있고 우리와

약간 다르다는 이유로 잔인하게 잘라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35명의 착한(?) 모범생들과

담임인 저는 정말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이 자알~ 생활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즈음부터 저에게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다음날부터 밤마다 저에게

정체불명의 문자메시지가 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문자메시지의 내용은 이상한 괴 문자가 아니라 하나같이 저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내용들이었습니다.

 

“선생님~ 오늘 많이 화나셨죠? 저희들이 일부러 선생님 화나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부득이하게 그렇게 되었어요. 부디 저희들 미워하지 마시고 사랑해주세요!” “

 

선생님~ 오늘 예배 마치고 나오면서 하늘을 보니 하나님 은혜가 제 마음 가득 느껴졌어요.

선생님과 이런 저의 마음을 나누고 싶어요. 사랑해요!”

 

“선생님, 고3 생활하면서 화나고 짜증날 때가 많아요.

하지만 선생님께서 함께 계셔주셔서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몰라요. 고맙습니다.”

 

이런 격려와 위로의 메시지는 거의 매일 밤 저의 휴대폰을 울렸습니다. 그리고, 그 메시지의

발신자에는, 항상 다음과 같이 표시되어 있었습니다.

『1004.』

 

1004(천사)의 메시지는 바쁘고 힘든 일상에 빠져있는 저에게 마치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원한

생수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익명의 「1004」는 마치 저의 상황을 빤히 알고 있는 것처럼 문자를

보내곤 했습니다.

매우 힘들고 지칠 때는 “선생님, 힘내세요. 많이 지치고 힘드시지요? 하나님께서 힘주시길 기도

할께요.”

실수해서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려할 때는 “선생님, 용기를 내세요.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하시잖아요!”

 

처음에는, 그 문자메시지가 한두 번 오다 말겠지 하고 생각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는데,

예상 외로 계속적으로 이어지자 저는 「1004」가 누군지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1004」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나름대로 많은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힌트(우리 반 아이, 교회 다니는 아이, 신앙이 아주 좋은 아이 등)를 가지고

종합해본 결과, 한 아이로 집중될 수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다름 아닌 우리 반 모범생 민아였습니다.

민아는 아주 신실하고 착하고 평소 저의 일을 잘 도와주어서 저의 상황을 가장 잘 이해해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 민아에게 더욱더 많은 애정과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민아가 나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낸다는 확신이 들자, 이상하게 그때부터 민아가 더 좋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네가 1004지?”라고 묻고 싶은 충동이 들 때도 많았지만, 졸업식 때까지

기다렸다가 고마움을 표현하자는 생각에 계속해서 저의 마음을 추스려야 했습니다.

민아는 그런 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가 뚫어지게 쳐다보면, 자기도 한번 씨익~ 쳐다

보고는 별일 없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곤 했습니다.

 

그렇게 몇 개월이 흘렀고,

「1004」의 사랑과 격려의 메시지도 저의 휴대폰에 차곡차곡 향기롭게 쌓여 갔습니다.

저는 힘들 때마다 지나간 「1004」의 메시지들을 보며 많은 위로를 받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졸업식 날이 되었습니다.

한 아이 한 아이에게 졸업장을 나누어주며 꼬옥 껴안아 주었습니다.

아이들은 포옥~ 안기기도 하고, 어색해하기도 하면서, 그렇게 제 품을 떠나갔습니다.

마지막 한 명의 아이가 떠날 때까지 교실에 남아 있다가, 아이들이 한 명도 남김없이 다 떠나고

난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교무실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교무실로 들어가던 그 순간 앗차! 그때서야 민아 생각이 났습니다.

이런, 심한 건망증! 민아에게 물어봤어야 했었는데, 고맙다는 말을 했어야 했었는데,

그만 민아를 그냥 떠나보낸 것입니다. 정말로 아쉬웠습니다. 어떻게 하지?

 

그런데, 그렇게 그냥 보내버린 민아에 대한 아쉬움에 젖어있던 저의 앞을 누군가가 갑자기 휘익

~하며 빨리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니?”

“저, 정희예요.”

“어, 정희구나. 그런데 정희야 왜 그러니?”

“아니에요, 선생님. 아무것도 아니에요.”

 

정희는 저의 질문에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하며 서둘러 제 앞을 떠나버립니다.

저는 그런 정희를 보고 약간은 의아해하며 제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제 책상 저쪽 한 쪽에 무언가가 올려져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자세히 보니 예쁜 노란색으로 물든 편지봉투였습니다.

 

‘누구의 편지지?’궁금해 하며, 편지를 뜯어보았습니다.

편지를 읽기 시작한 후, 저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급기야는 엉엉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 편지는, 다름 아닌, 제가 ‘쟤만 없었으면’하고 생각하며 내팽개쳤던,

우리 반에서 가장 쓸모없어 보였던 정희가 쓴 것이었습니다.

 

『선생님, 고3 너무나 중요한 시기에 선생님을 만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려요.

바른 길로 잘 이끌어주시고, 항상 격려와 용기 북돋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때론 선생님께 말도 하지 않고 보충시간에 나가버리고, 선생님 속상하게도 했었는데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주시고 항상 꾸짖음보다 기회를 먼저 주셔서 제가 더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선생님, 제 형편 알아주셔서 관심 가져주시고 챙겨주셔서 감사해요.

선생님의 기도 덕분에 제가 졸업을 무사히 할 수 있게 되었어요.

선생님을 만난 건 제 일생의 가장 큰 행운이예요.

선생님 정말 고마워요.

저도 선생님의 가르침과 사랑, 신앙을 배워서 다른 사람을 섬기며 살께요.

선생님께 하나님의 축복이 가득하길 기도할께요. 감사하고 사랑해요.

선생님을 정말 좋아했던 1004 정희 드림!』

 

………

………

정희야, 정희야!

정희의 편지를 던져두고, 얼른 교무실 밖으로 뛰어나갔습니다.

“정희야! 정희야!”아무리 불러도 정희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정희야,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내가 가장 미워하고, 가장 매정하게 대했던 네가

나에게 가장 큰 힘을 주었던 1004였다니. 정희야 정말 미안해. 날 용서해주렴.

 

정희가 저의 「1004」였던 것을 알고 난 후, 정희에 대한 사무치는 미안함과 죄책감에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서울 I대에 진학한 아이, 부산 명문대에 진학한 아이,

밤새도록 입학사정관 추천서 써주어 서울 명문대에 입학한 아이,

3년간 영어를 가르친 아이, 제가 그렇게 모범생이라고 칭찬했던 다수의 아이들,

그리고, 저를 가장 잘 이해해줄 거라고 생각했던 민아까지,

그 아무도 졸업식 날 담임인 저에게 고맙다는 말은커녕,

문자메시지 한 통도 보내지 않았습니다.

 

다만, 오로지 한 명, 제가 내팽개쳤던 한 아이…

모두 다 귀찮아하고 싫어했던 아이,

버린 돌처럼 취급받고 만물의 찌꺼기같이 되었던 아이,

원서 쓸 때 제대로 한번 봐주지도 못했던 아이,

바로 그 아이 정희만이 저를 잊지 않고, 감사의 편지를 보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아이가 몇 달 간 매일 밤마다 졸린 눈을 비비며 휴대폰의 문자를 꼭꼭 누르며

저만을 생각하며 힘든 제 영혼을 어루만져주었던 「1004, 천사」였습니다.

 

올해, 또 새로운 아이들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첫 시간, 역시나 이번 반에도 정희 같은 악동(^^)들이 여러 명 보입니다.

그 아이들을 볼 때마다 다시는 정희에게 저질렀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으리라 결심을 합니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치 아니하시고,

각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숨은 동기를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가려고 합니다.

왜냐면, 그 녀석들 중에 또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저만의 「1004」가 있을 테니까요. ♣ 

 

 교사. 두 아이의 엄마.

부산 인터넷 갈릴리마을 가족

필명: 향유를 붓는 이
갈릴리마을 해와 달 2010년 4월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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