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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품을 수 있을까?

안산차도리 2010. 1. 8. 11:24

아버지를 품을 수 있을까?

 

황교진

 

“야! 이눔의 자식아, 니는 애비한테 전화도 안 하냐?”

교회에서 늦게 모임을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짜증과 고함이 섞인 아버지의 전화를 받았다.

자꾸 내가 취직했는지만을 캐물으시는 아버지 전화에 감정이 들끓어 올랐다.

운전하는 중에 오랫동안 켜켜이 쌓인 감정이 폭발하고 말았다.

“제가 최근에 왜 전화를 못 드렸는지 아버지가 아세요?

 제가 지금까지 가장 힘들고 괴로울 때 격려와 위로 한 마디 해준 적 있으세요?

 마음 아픈 소리만 자꾸 하시니까 아버지와 전화만 하면 있던 기운도 다 빠져요.”

 

“뭐, 이 새끼야? 내가 언제 그랬어?”

더 이상 운전 중에 술 취한 아버지 목소리 들으며 싸우고 싶지 않았다.

일단 전화를 끊고 차를 한적한 곳에 대었다.

그리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아버지께 전화를 걸었다.

“저예요.”

“야, 나는 너 출세시키고 잘 되라고 그러는 거지, 언제 너를 괴롭혔다고 그래?”

“제가 전화해서 안부를 여쭈어도 오직 직장 어떻게 됐냐고만 관심을 가지신 게 아버지예요.

 요즘 저는 전화드릴 때마다 패배자의 심정으로 절망감만 들어요.

 제가 이런 시기에 아버지와 말하는 게 왜 힘든지 모르실 거예요.”

다시 아버지의 언성이 높아졌다. 그 후로 내게 고함만 지르시다가 전화를 세 번이나 끊어버리셨다.

그리고 결국 가장 내가 아파하는 곳을 또 건드리셨다.

 

“너는 엄마한테 손 떼. 더 이상은 힘들어서 안 되겠어.”

이 말씀은 그 동안 내게 계속 해 오신 의도가 함축되어 있다.

엄마는 죽은 목숨이고 당장 죽어야 한다는 얘길 결혼 초부터 간간이 강조해오셨다.

아버지 사시는 집으로 엄마를 옮겨놓고 문을 딱 걸어 잠그면 하루 만에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내가 이 병원 저 병원 알아보며 더 나은 병원을 찾아 어머니를 옮기며 치료와 간호를 계속하고

지출하는 것을 미련한 놈이라고, 엄마는 돈 먹는 하마일 뿐이라고 못마땅하게 여기는

아버지의 그 생각에 부딪힐 때마다 속으로 눈물을 토하곤 했다.

심지어 아내에게 전화하여 나를 포기시키라는 지시도 여러 번 하셨다.

나는 그런 생각 하지 마시라고 수차례 부탁드리며 설득도 해보았지만,

아버지는 안 그러마 약속해놓고 다시 고집을 꺾지 않으셨다.

내게 엄마 병원비를 대줄 수 없는 게 자존심이 상하신다는 거다.

 

아버지의 자존심…

내가 그 동안 받은 수많은 하드코어적인 상처들이 아버지의 자존심 때문이었다.

집에 돌아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감에 빠졌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 동안 아버지께 받은 숱한 고통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분노가 내 속에 가득 차서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말씀을 읽을 수도 기도할 수도 없었다. 글도 쓰기 싫었고, 피로감만 몰려왔다.

이무석 박사가 쓴 <나를 사랑하게 하는 자존감>이란 책을 집어 들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며 아버지와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우리 부자의 모습을 놓고 정신분석학인 설명을 살펴보았다.

 

[ 첫번째 ]

1977년 초등학교 입학식 날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그렇게 많은 또래 아이들을 본 적이 없었다.

외할머니 집에서 주로 자라오며 내가 주변에서 본 것은 마당의 개와 닭들뿐이었다.

하늘의 구름과 닭장 속의 포도나무 한 그루만 무언의 친구가 되어주었다.

갑자기 외할머니 집에 낯선 어른들이 오시면 괜한 두려움에 가까이 가지 못했고,

그 어른들이 내게 무언가 물어보셔도 고개만 설레설레 흔들며 말을 못했다.

그런 내가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서울의 부모님 집으로 가게 되었다. 모든 것이 낯설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다고 가슴에 가재 수건과 이름표 걸고 운동장에 많은 사람들 속에 서 있는 것

자체가 큰 긴장이고 두려움이었다.

단 위에 계신 선생님이 노래와 함께 율동을 지도하셨다.

“어린 송아지가 부뚜막에 앉아…”

처음 들어보는 동요에 다들 율동을 따라하는데 나는 어색하고 어찌할 바를 몰라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날 바보같이 서 있기만 한다고 아버지한테 엄청 매를 맞았다.

나는 내가 왜 맞아야 하는지 모르고 섧게 울기만 했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계속 되었다.

특히 선생님 질문에 대답해야 할 때, 교과서를 읽어보라고 시킬 때 멀쩡하던 목소리는 변조되었고,

글을 잘 읽을 줄 알아도 항상 긴장하며 떨었다. 윗사람들과 마주할 때 항상 겁이 났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강단에서 간증하기 전에 늘 긴장과 두려움이 앞선다.

내 속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 때의 그 아이가 지금도 가끔씩 떠올라 여러 사람들 앞에 서기 전에는

꼭 기도로 잠재우는 것이 필수이다.

“하나님, 이 떨리고 두려운 심정 아시죠?

 제 속에 박혀 있는 상한 아이의 심정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회복되었으니

 당당하고 떳떳하게 받은 은혜를 솔직하게 전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세요.”

 

[ 두번째 ]

 중학교 2학년 때 외사촌 형님이 우리 집에서 대학교를 다녔다.

형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공부에 맛을 들여 갑자기 등수가 급상승했고,

고려대학교 사범대학에 84학번으로 진학했다.

학생운동에 관심을 많이 가졌던 형은 매일 밤 10시가 넘어 집에 들어왔다.

밤 10시쯤 아버지는 내가 무얼 하고 있는지 확인하러 방에 들어와서는 자고 있는 나를 깨우셨다.

형은 책상에 앉아 책을 보는데 너는 왜 자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때 나를 때리던 도구가 하필이면 파리채였다. 파리채로 내 뺨을 때리며 야단하셨다.

“니가 이렇게 잠만 자면 어떻게 고대를 가겠냐? 이 자식아!”

오후 서너 시면 하교하여 숙제 다 마치고 밤 열 시면 잠자는 게 뭐가 문제인지 몰랐던 나는

아버지께 그렇게 또 억울한 매를 맞아야 했다. 내가 과연 파리채로 맞을 짓을 한 것인가?

그 모든 게 아버지의 자존심 때문이었다.

외종질보다 더 잘 난 아들을 만들고 싶으셨고, 친구들 자식보다 내가 더 자랑할 만한 거리가 있어서

반드시 당신의 자존심이 세워지셔야만 했다.

 

[ 세번째 ]

고등학교 때 군 제대 후 복학한 외사촌 형은 늘 나의 롤모델이면서 열등감을 느끼게 하는 대상이었다.

형은 자신이 목표로 한 것은 반드시 이뤄내는 의지가 있었다.

학생운동을 하면서 과대표로 학우들의 지지를 받았고, 성적우수 장학금도 받았다.

나는 형과 비슷해지고 싶은 마음의 한 편에는 아버지의 자존심을 세워드리고 싶기보다는

형만큼 되어야 늘 고생하시는 어머님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고3 때 A대를 지원했다가 떨어졌다.

그런데 정말 충격적이었던 것은 아버지가 주변에 내가 대학에 합격했다고 하신 것이다.

나는 아버지 주위 분들로부터 축하전화를 받으며 아버지의 자존심을 지켜드려야 한다는 생각에

거짓말로 대답해야 했다.

그때 형용할 수 없는 상처를 견디며 가짜 대학생 행세를 하면서

나는 아버지의 자존심을 위한 액세서리란 생각이 들었다.

인생에서 나락으로 떨어질 때 아버지를 멀리해야 상처를 덜 받는다는 자기보호 기능이 생겼다.

그래서 실직자 상태인 지금, 아버지와 통화하기가 무척 어려운 일이 되었는지도…

그리고 재수(再修) 시절 내내 아버지께 학원비를 타야 할 때 죄인의 심정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너 때문에 미치겠다”는 얘기를 자주 하셨다.

그때 나는 내가 왠지 지저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틈만 나면 자주 샤워를 했다. 땀이 조금만 흐르면 얼른 씻어야 한다는 강박증, 결벽증이 찾아왔다.

그러다가 전후기 시험 모두 떨어지고 삼수(三修)를 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어려서부터 세심하게 양육을 못하고 고등학교 때 등록금도 제 때 못 쥐어줘서

어깨가 푹 처진 채로 다니게 하여 그저 미안하다는 얘기만 하셨다.

나는 꼭 성공하고 싶었다. 하지만 학원비 탈 면목이 없었다.

혼자 조용히 도서관만을 찾아 삼수 시절을 보냈고, 그해 전기대에 또 떨어졌다.

ARS로 불합격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추가합격자 명단을 보러가려는데 어머님이 같이 가겠다고

하셨다. 추가합격자 명단에도 아들 이름이 없는 것을 확인한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셨다.

내가 너 어릴 때부터 잘 돌보지 못해서 네가 너무 힘든 것 같다며 슬퍼하셨다.

나는 걱정 마시라고, 후기에 서울에 있는 대학에 들어갈 테니 희망을 가지시라며,

되레 엄마를 위로해드렸다.

그날 엄마는 용기를 내라며 고기 집에 들어가 마음껏 먹으라며 삼겹살을 사주신 후

따뜻한 오리털파카도 한 벌 사주셨다.

안전하게 지방대에 하향지원하라고 하셨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한 달 남짓 남은 기간에 후기 분할로 모집하는 대학을 목표로 공부에 전념했다.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지나는 순간이 무척 힘들었다.

그리고 전후기 분할 모집을 한 B대 건축공학과에 당당히 합격했다.

너무나 기뻐서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더니, 엄마가 우시면서 가게 문을 얼른 닫고 축하파티를

열어주겠다고 집으로 달려오셨다.

아버지께도 전화를 드렸지만, 아버지는 별 반응이 없이 “그래, 알았다”라고만 하셨다.

그날, 아버지 주변에 계셨던 분들 모두가 내가 이미 대학생인 줄 알고 있었기에

티를 내실 수 없었던 것이다.

 

[ 네번째 ]

그렇게 한참 예민했던 시 절이 지나갔지만,

내 속에는 정화되지 않은 상한 감정이 아버지의 호통과 격한 기질을 접할 때마다 떠오르곤 했다.

그 정점이 집에서 두문불출하고 어머니 간호를 할 때였다.

시간이 3년, 4년 흐르자 술자리에서 아버지 친구 분들이 나에 대한 비판을 가하셨다.

대학원까지 휴학하고, 회복될 가능성이 없는 엄마 옆에 붙어서 사는 그 애는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분명히 문제가 많다는 것이다.

정상이라면 여자를 만나 결혼하고 자기 삶을 살아야지, 몸에 문제가 있으니까

집에서 그렇게 붙어 있는 게 아니냐는 얘길 들은 아버지는 자존심이 상하셨다.

아비의 심정으로 아들을 보호하기는커녕 친구들의 시선이 조금이라도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견디지 못하셨다.

아버지에겐 주변 사람들의 평판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술에 취해 오셔서 내가 엄마를 간호하고 있는 방문을 걷어차며 온갖 욕설을 다 퍼부으셨다.

너 때문에 내가 이런 말까지 들으며 산다고.

나는 내가 집에서만 견디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세상의 모습을 보여주시며 훈련시키시는구나 하며

이 모든 상황이 끝나는 하나님의 때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 다섯번째 ]

어머니가 쓰러지실 무렵에 MBC에서 「그대 그리고 나」라는 주말연속극이 인기리에 방송되고 있었다.

최불암이 아주 격한 성격의 아버지였고 박상원이 장남이었다.

당시 최진실이 며느리로 나왔는데, 이 집안도 아주 가관이었다.

선장이었던 아버지 최불암은 자기 기분 따라 사는 아버지였다.

박상원이 어릴 때 좋아했던 식모 누나가 있었는데 아버지가 건드려 막내아들 송승헌을 낳았다.

박상원은 송승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느 날 박상원은 자기 방에서 아내(최진실)를 안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나는 어렸을 때 얼른 어른이 되어 힘을 키우고 싶었어.

 아버지 앞에 약자로 살면서 당한 설움을 갚아주고 싶었어.

 때로는 아버지를 힘으로 이기고 싶을 만큼 너무나 괴롭고 아팠어.”

박상원의 그 대사 장면이 지금도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는다.

너무나 공감이 되었고 똑같은 심정이었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내게 강자로 군림하려고만 하시는 아버지를 보면 드라마 속의 박상원처럼

화가 나고 괴롭기만 했다.

 

[ 여섯번째 ]

2004년 초에 집을 내놓 게 되어 더 이상 어머니를 집에서 간호할 수가 없는 형편이 되었다.

IMF를 지나오며 집에서 엄마를 간호한 지 만 7년이 넘었으니, 그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나는 화곡동의 요양시설을 소개받아 어머니를 집에서 그리로 옮겨놓고 거의 매일 가방에 의료용품을

담아 지하철을 타고 달려가 간호해드렸다.

그 때 내가 쓴 『어머니는 소풍 중』이라는 책이 발행되었다.

아들의 책이 세상에 나오자 아버지는 신기하게 여기며 다시 친구들에게 떠들썩하게 자랑을 하기

시작하셨다.

방송도 출연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도 존재했다.

내가 방송에 나가 아버지 얘기를 너무 적게 하거나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에

“자식새끼, 키워봐야 소용없다”며 토라지셨다.

가끔씩 책 내용을 문제 삼아, 어떻게 아버지 고생한 얘기는 그렇게 소홀하게 다룰 수가 있냐며

트집을 잡으셨다.

나는, 방송은 그쪽에서 편집하는 것이고, 주제가 어머니 병간호에 집중되어 있고, 책도 출판사에서

편집하여 나오는 내용이라고 말씀 드렸지만, 아버지의 분노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친구들이 다 아버지가 주목되길 기대하는데 너는 엄마 얘기만 한다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로 인해 답답한 상황에서 숨통을 트기 위한 지혜를 구해야 했다.

이 외에 더 심한 얘기가 있지만, 글로 남기기는 어렵다.

 

내가 주일 밤 아버지와 통화한 후 그 동안 억눌러 온 모든 상처와 분노들이 부유물로 떠올랐다.

내 힘으로는 청소하려고 해도 도저히 덜어내 지지 않았다.

더 이상은 이렇게 억눌러놓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은 맞닥뜨려서 말씀을 드리고 이해를 구하지 않으면 아버지는 내게 계속 힘든 존재로

자신의 기질과 성격을 참지 않으시리란 생각이 들었다.

수요일 저녁에 만나 뵙기로 했다.

아버지와 대화를 나눈 후에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월요일부터 수요일에 이르기까지 나는 밥도 제대로 먹을 수 없었고 운동도 할 수 없었다.

좀체 회복되지 않은 피로감을 반신욕을 하면서 겨우 풀었지만,

오만가지 생각이 들면서 긴장이 되고 떨렸다.

다행히 써야 할 원고는 내 손에서는 거의 다 끝났기에 이러한 침체를 누릴 여유는 있었다.

 

수요일에 어머니께서 계시는 병원에 달려가 지난 한달 치 병원비를 결재하고

오후 늦게까지 간호해드렸다.

피부병은 조금씩 낫는 듯해도 엉덩이의 욕창은 더 나빠지지도 회복되지도 않았고,

뼈만 앙상하게 남을 만큼 살이 많이 빠지셨다. 관절도 완전히 굳어 가시는 듯하다.

인생은 고통의 연속인 듯 마음이 아프고 괴로웠다.

하지만 간호하는 순간만큼은 우리 모자 모두 호흡에 생기가 돌고 마음이 편해진다.

내가 흘리는 땀과 수고만큼, 죄송하고 괴로운 마음이 개운함으로 바뀌었다.

병 간호 후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아버지를 만나려다 시간이 너무 늦어져서

그대로 부천에서 천호동까지 달려갔다. 아버지를 차로 모시고, 조용한 중국집으로 갔다.

하필 그날 탕수육을 시키면 서비스로 고량주가 공짜로 나왔다.

술을 음식처럼 드시는 아버지가 이를 그냥 지나치실 리가 없었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참아온 모든 일들을 털어놓는 게 지혜로운 것인지, 아니면 그냥 혼자서 계속 정리

해가며 아버지께 다시 한 번 조용히 나를 지켜봐달라고 부탁을 드려야 하는 것이 맞는지 고민하면서

말문을 쉽게 열지 못했다.

그런 중에 고량주 몇 잔을 들이킨 아버지가 먼저 말씀하셨다.

“그날은 내가 화가 나서 그렇게 짜증을 좀 냈다.

 니가 조용조용하게 아비 말을 받아줬으면 그냥 넘어갈 일인데 왜 그리 화를 냈는지 모르겠다.

 엄마에 대해 그렇게 얘기한 것은 취소할 테니까 니가 혼자 힘으로 잘 해봐라.”

‘이렇게 그냥 넘어갈까? 하지만 언젠가 또 반복되면…’

결국 나는 마음에 품어왔던 어린 시절 상처들을 아버지께 꺼내놓기로 했다.

초등학교 입학식 때 맞은 얘기, 중학생 때 파리채로 맞은 얘기, 대입 시험에서 떨어졌지만 주변에

붙었다고 하여 마음 아팠던 얘기… 하나하나 얘기할수록 아버지의 언성은 높아만 갔다.

“내가 언제 너한테 그랬냐?”

일단 아버지는 기분 상하는 얘기에는 습관적으로 발뺌부터 하며 인정하려 들지 않으셨다.

나는 원래 상처를 준 쪽에서는 쉽게 잊어먹고 살지만, 맞은쪽은 평생 한이 되는 경우도 있으니

아버지가 제 입장이 되어 들어보시라고 말씀드렸다.

결국 아버지는 발뺌을 멈추셨다. 그리고 고량주에 벌게지신 얼굴로 고함 섞인 말씀을 이어갔다.

“그때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니가 아냐? 너 잘 되라고 그렇게 한 거지, 너 망하라고 그랬겠냐?

 너는 내 의도를 그렇게 모르냐? 내 자존심이 있는 걸 생각도 못하냐?”

“그렇죠. 아버지? 아버지가 사랑하신 것은 제가 아니라 아버지 자존심이셨죠?”

그러자 아버지가 조용해지셨다. 내 얘기를 조금도 인정하지 않으시다가 그때서야 자신의 모습을

처음 인정하신 것이다.

“아버지, 이제는 저도 나이가 마흔이고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기르며 살고 있어요.

 아들이 정말 원하는 삶을 살도록 인정하시고 아들의 마음도 아버지 자존심처럼 세워주셔야죠.”

그러자 아버지께서 이러셨다.

“…… 그래, 내가 니 얘기를 들어보니 내가 너무 내 욕심만 채우며 살았구나.

 니가 이렇게 털어놓고 얘기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나는 아버지 이 말에 눈물이 핑 도려는 걸 참았다.

이런 고백을 내게 처음 하신 것은 하나님이 개입하신 기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도 아버지를 인정해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 국민학교만 나오시고 할아버지가 큰 아버지만 공부시키고 둘째인 아버지는 중학교에도

 제대로 안 보내고 산에 가서 나무해 오라고 하신 것 알고 있어요.

 얼마나 괴로우셨겠어요?

 그렇게 사랑받지 못하고 혼자서 서울에 올라와 돈 벌려고 애쓰시면서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으려고

 자존심과 체면을 지키시려 했던 것 저도 알고 있어요.

 저도 교회에서 아버지 또래의 장로님 집사님들 뵐 때마다 왜 우리 아버지는 저렇지 못하실까 하며

 욕심을 부렸어요.

“제가 원하는 삶은 출세하는 삶이 아니라 가치 있게 사는 삶이에요.

 어머니와 같은 환자들 돕는 목회를 하는 게 제 꿈이니,

 지금 제가 살고 있는 모습 그대로 지켜보고 격려해주세요.”

그러자 아버지께서 답하셨다.

“그래, 그러자. 니가 엄마 병원비 때문에 고민하며 취직하려고 애 많이 쓰고 있고,

 제일 답답한 것도 넌데, 내가 직장 문제 놓고 자꾸 닦달하면서 물어봐서 미안하다.”

아, 우리 부자(父子)가 처음으로 마음이 깊이 통한 순간이었다.

 

나는 중국집을 나와 아버지를 다시 모셔다 드리면서 헤어지기 전에 꼭 안아 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하필 차를 갓길에 댄 후 바로 빠져나와야 해서 그러지 못했는데,

아버지가 내리시기 전에 기어 위에 올려진 내 손을 꼭 잡아주시며 말씀하셨다.

“잘 살아라.”

흑 ㅠㅠ ……

 

나는 비상등을 켜고 차를 몰면서 마음이 울컥했다.

백미러에는 아버지가 손을 흔들며 바라보는 모습이 진한 여운으로 남아 있었다.

이제 내 마음이 시원한 것이 아니라 좀 더 아버지를 이해해 드리지 못한 미안함에 오히려 무거워졌다.

당신 자신이 내게 한 일들을 기억도 못하시는데 괜히 다 끄집어내어 아프게만 해드린 것이 아닐까?

후회가 되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꼭 풀어야 할 일을 당겨서 치렀고,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만간 다시 식사 자리를 만들어 한 번 더 마음 편하게 해드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대한민국 장남, 아버지를 품을 수 있는 여유는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나는 불가능하지만, 내 삶의 근원인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신다.

앞으로도 계속 기도해야 한다. 예수님이 중보해주고 계심을 바라보니 한없는 평안이 밀려온다. ♣

 

「어머니는 소풍 중」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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