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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의 눈물~

안산차도리 2009. 12. 8. 00:34

목사의 눈물

 

김정수

교역자. 광주등림교회.  

 

참 오랜만에 L 할아버지께서 교회에 나오셨습니다.

L 할아버지는 1년 전 천국에 가신 P 집사님의 남편이십니다.

그 동안 길에서 나와 마주칠 때마다 돌아가신 P 집사님이 생각난 때문인지 눈시울을 붉히곤 하셨던

L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나이 열다섯에 한 살 연상인 P 집사님을 만나 자그마치 70년을 함께 해로(偕老)하셨습니다.

그러므로 P 집사님에 대한 할아버지의 애틋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L 할아버지를 보자, 내 기억은 어느새 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예배당 앞에 놓아둔 군자란이 빠알간 꽃잎을 막 피워내던 어느 날,

새벽기도회에 나간 나는 단정한 모습으로 앉아 계신 P 집사님을 보았습니다.

사실 교회에서 가장 가까운 집에 사시지만, 고령(高齡)에 거동마저 여의치 않아 새벽기도회에 잘 참석하지

못함에 대해 나를 볼 때마다 늘 미안해하시던 P 집사님이셨기에 나의 반가움은 그만큼 컸습니다.

그런데 한 번으로 끝날 줄 알았던 P 집사님의 새벽기도회 참석은 돌아가시기 전날까지 약 한 달 동안이나

계속되었습니다.

이러한 P 집사님의 행적을 두고 훗날 교인들은,

집사님이 돌아가실 때가 되자 아직 신앙을 갖지 않은 할아버지와 당신 자녀들을 위해 그리했던 것 같다며

이구동성으로 말했습니다.

한 달 후, P집사님은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고, P 집사님의 장례는 ‘교회장’으로 치러졌습니다.

절에 다니는 큰 아들 내외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교회장으로 치를 수 있었던 것은

P 집사님을 배려한 L 할아버지의 결단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장례를 마친 다음 주일, 놀랍게도 할아버지께서 교회에 나오셨고, P 집사님이 늘 앉으시던 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주일도, 또 그 다음 주일도 할아버지는 계속해서 같은 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렇게 6주째 주일예배를 마치고 난 점심 나절,

교인들과 더불어 식사를 하는데 그날따라 왠지 L 할아버지의 안색이 어두워 보였습니다.

내심 할아버지와 말이나 좀 나눠볼 요량으로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화장실에 다녀와서 보니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옆에 있던 I 집사님에게 “혹시 L 할아버지 댁에 뭔 일 있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I 집사님 왈,

“아까 오전 예배 시작허기 전에 나한테 그럽디다!

 낼 모레가 P 집사님 49재(齋) 되는 날잉께 목사님이랑 와서 예배 조까 드려달라고라.

 그래서 내가 못 간다고 그랬구만이라.

 안 그요, 목사님?

 아니, 49재는 절간에 댕기는 사람들이나 지내는 것이제, 49재예배가 다 뭐다요! 나 원 참!”

 

I 집사님의 말을 듣는 순간, 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습니다.

물론 I 집사님으로서는 49재라는 ‘낯선 예배(?)’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큰 죄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는 I 집사님에게, 중요한 것은 ‘49재’라고 하는 용어가 아니라,

우리 교회 성도들이 L 할아버지 댁을 방문해서 주님의 이름으로 함께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 그 가정이 살아 생전 P 집사님이 그렇게도 원하셨던 ‘믿음의 가정’으로 설 수 있도록 돕는 데

목적이 있음에 대해 말했습니다.

 

오후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 L 할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낼 모레가 P 집사님 소천하신 지 49일째 되는 날인데, 와서 예배를 드려줄 수 있느냐는 말씀이셨습니다.

나는 흔쾌히 그러마고 약속했습니다.

P 집사님 소천하신 지 49일째 되는 날, 나는 열댓 명의 성도들과 함께 L 할아버지 댁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나자, L 할아버지는 내 손을 붙잡고 몇 번이고 감사를 표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L 할아버지를 다시 길에서 만났을 때, 할아버지는 앞으로는 교회 안 나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유를 묻는 나에게 할아버지는 49재 예배와 관련해 I 집사님과의 일에 대해 서운한 마음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래도 일가간이라 믿고 젤 먼저 말한 건데, 와 보지도 않고, 어찌 그럴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L 할아버지의 말을 듣고 있던 내 눈은 이미 촉촉이 젖어 들고 있었습니다.

나는 I 집사님을 대신해서 눈물을 흘리며 사과했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다시는 교회에 가지 않겠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뒤로 거의 1년만에 교회에 나오신 것입니다.

 

예배를 마치고 반갑게 맞는 나에게 L 할아버지가 말했습니다.

“목사님 눈에 눈물 나게 해서 참말로 죄송했구만이라우.”♣

 

교역자. 광주등림교회.
갈릴리 마을 월간쪽지 "해와 달" 2009년 11월호에서 퍼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