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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타민 G

안산차도리 2012. 1. 30. 08:51

비타민 G

박 영 욱

 

★ 딸아이가 어렸던 옛날 일이다.

“아빠, 사자 먹으까? 코뿔소 먹으까?”

“아무 거나 먹어.”

“시러, 아빠가 골라줘. 사자 먹으까, 코뿔소 먹으까?”

“사자 먹어.”

“엄마는 코뿔소 먹으랬는데?”

“그럼 코뿔소 먹든지.”

“아랐쪄.”

 

딸아이 유빈이가 먹는 영양제에는 여러 가지 동물 모양이 새겨져 있다.

약을 무척 싫어하는 유빈이 같은 아이들도 동물 고르는 재미에 아침저녁으로 꼬박꼬박

잘 챙겨먹게 하기 위해서 제약사 나름대로 굴린 잔머리의 결과다.

당의정을 따로 입히지 않아도 이런 의도는 아이들에게 그런대로 먹힌다.

내가 볼 땐 그 놈이나 그 놈이나 다 똑같은 놈이지만 유빈이는 약을 먹을 때마다 고민

한다.

사자를 잡을까, 코뿔소를 작살낼까.

 

저녁 때 퇴근하면 또 묻는다.

“아빠, 사자 먹으까, 코뿔소 먹으까?”

“코뿔소 먹어.”

“아침에도 코뿔소 먹었잖아?”

“아 그랬지. 그럼 사자 먹어.”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아이는 사자 한 마리를 꿀떡 삼킨다.

유빈이가 복용하는 약은 어린이 종합 비타민이다.

아이의 성장을 돕기 위해 아마 지 엄마가 사다 먹이는 것 같다.

다음에는 가급적 동물그림 없는 걸로 사왔으면 좋겠다.

 

교회에서 목사님께로부터 「비타민 G」에 관한 설교 말씀을 들었다.

비타민 G는 비타민 그레이스, 은혜의 비타민을 말한다.

우리 딸 유빈이가 아침저녁으로 먹는 사자나 코뿔소에는 들어있지 않은, 아주 특별한

비타민이다.

최명자님이 부르신 <감사 찬송>이라는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나는 왠지 가슴이 먹먹해지고는 한다.

 ‘응답하신 기도 감사, 거절하신 것 감사’ 시작되는 노랜데

 ‘길가에 핀 장미꽃 감사, 장미꽃의 가시도 감사’같은 가사가 뒤를 잇는다.

 

처음 이 노래를 들었을 때 노랫말 중 <거절>이란 대목에서

나는 그만 가슴이 턱 막히면서 하마터면 눈물이 날 뻔했다.

돌이켜보면 살면서 주님이 내게 주신 것은 거절의 연속이었던 것 같았기 때문이다.

주님은 내게 허락하신 것보다 거절하신 것이 훨씬 더 많았다.

짧은 순간 내 살아온 일생이 파노라마처럼 스쳤다.

 

주님은 내게 건강의 축복을 거절하셨다.

그래서 늘 삶의 끝자락을 서성이게 하셨다.

남들처럼 활달하게 유년생활을 즐기지 못했고 죽음의 언저리를 배회하면서 암울한

청년기를 보냈다.

하지만 건강의 축복을 거절당한 대신 나는 긍휼을 배웠다.

 

주님은 또 내게 재물의 축복도 거절하셨다.

그래서 돈과 경제적인 가치에 너무 기대거나 의지하지 않게 하셨다.

너무 똑똑하거나 잘나지 않게 하셔서 스스로 교만에 빠지지 않게 하셨고

수많은 실패를 주셔서 실패자들 앞에서 거들먹거리거나 비웃거나 그들을 조롱하지

못하게 만드셨다.

 

다만 아프고 병들고 실패하여 좌절하는 이들을 헤아리고

그 상한 심정을 긍휼히 여길 줄 아는 마음을 그나마 주님은 내게 <허락>하셨다.

 

생각해보면 하나님 상표의 비타민 G, 은혜의 약효는 같은 것이다.

거절의 모습이든 혹은 허락의 모습이든!

코뿔소, 사자는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것을 삼키고 나면 약효는 다 똑같다.

 

살면서 내게 허락된 거절의 은혜가 눈물겹다.

동물 그림이 그려지지 않은 비타민 G 한 알을 골라 물 한 모금 털어 넣고

오늘도 꿀떡 삼킨다. ♣

 

인터넷 갈릴리마을 가족


월간 쪽지 해와 달 2012년 1월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