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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선물

안산차도리 2009. 5. 12. 21:51

 어떤 선물

 

 1962년 11월 말이었다.

그 날 아침, 내 사촌 집에 우유를 배달하러 온 벤은 평소와는 달리 풀이 죽어 있었다.

몸이 가냘픈 이 중년남자는 도무지 말할 기분이 아닌 것 같았다.

캘리포니아 주 론데일로 이사 온 나는 우유배달원이 아직도 우유를 현관 계단까지 배달해 준다는 것이

기뻤다.

나는 집을 구할 때까지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사촌의 집에서 기거하면서 벤을 만날 때마다 재치가 넘치는

그의 얘기를 즐겨 듣곤 했었다.

그러나 그 날 우유배달 차에서 우유병들을 내려놓는 그의 얼굴은 매우 우울했다.

그에게서 이야기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차근차근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져야 했다.

그는 좀 쑥스러워 하면서 고객 2명이 우유 대금을 내지 않고 이사를 갔기 때문에 자기가 손해를 보게

되었다고 털어놓았다.

그 중 한 사람은 떼어먹은 돈이 10달러밖에 안 되었지만 다른 한 사람은 밀린 돈이 79달러(약10만원)나

되는데 이사 간 집 주소도 남겨 놓지 않았다는 얘기였다.

벤은 우유대금이 그렇게 불어나도록 한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며 속상해 했다.

“예쁘장한 아주머니였지요.” 그가 말했다.

“애들이 여섯 있었는데 또 한 아이가 뱃속에 들어 있었지요.

그 여자는 늘 ‘일자리를 하나 더 얻으면 금방 돈을 낼게요.”하고 말했지요.

나는 그 말을 믿었어요. 내가 바보였지요!

난 좋은 일을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와서 보니 내가 당한 거예요.”

나는 그저 “안 됐군요.”하고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음번에 만났을 때는 그의 분노가 더욱 심해진 것 같았다.

그는 화난 얼굴로 자기 우유를 몽땅 마셔 버린 버르장머리 없는 그 집 아이들에 관해 얘기했다.

귀엽다던 그 집 아이들이 이제는 나쁜 아이들로 변해 있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위로의 말을 하고 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벤이 떠나고 난 후 나는 내 자신이 그의 문제에 말려들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어떻게든 그를 돕고 싶었다.

이번 일이 자칫 착한 한 사람 하나를 망쳐 놓겠다고 걱정이 된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생각해 보았다.

그때 문득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과 함께 옛날에 할머니가 내게 하시던 말씀이 떠올랐다.

“어떤 사람이 네 물건을 빼앗으려 하거든 그 물건을 그에게 주어 버려라. 그러면 빼앗기는 법이 없단다.”

 

다음번에 벤이 우유를 배달하러 왔을 때 나는 옛 고객에게 떼인 79달러에 대해 속 편하게 생각하는

방법이 생각났다고 말했다.

그가 말했다. “아무 소용없을 겁니다. 하지만 어디 한 번 얘기해 보시지요.”

“그 아주머니에게 우유를 주어 버리는 거예요.

 그 우유가 필요한 아이들에게 그걸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어버리는 거예요.”

“날 놀리는 거요?” 그가 말했다. “난 내마누라에게도 그렇게 비싼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 적이 없어요.”

“성경에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 나를 따뜻하게 맞이하였다」는 말씀이 있지요?

그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마음속에 따뜻이 맞이하도록 하세요.”

“그 여자가 나를 속인 건 어떡하구요? 79달러가 아주머니 돈이 아니니까 그렇게 말하는 거라구요.”

나는 그쯤에서 접어 두었지만 그래도 나의 제안이 옳다는 생각은 변함없었다.

나는 그가 올 때마다 이 문제에 대해 농담을 하곤 했다.

“이제 그 여자에게 우유를 선물했겠지요?”

“아니요.”그가 말을 받았다.

“하지만 또 다른 예쁘장한 아주머니가 내 호의를 배반하지만 않는다면 내 마누라에게 79달러짜리 선물을

사줄까 생각중입니다.”

내가 그 질문을 할 때마다 그의 마음이 조금씩 풀리는 것 같았다.

 

그러던 중 크리스마스를 엿새 앞두고 마침내 일이 해결되었다.

그가 반짝이는 눈으로 밝게 미소 지으며 찾아왔다.

“해냈어요!” 그가 말했다.

“그 우유를 크리스마스 선물로 그들에게 줘 버렸어요.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내가 손해 본 건 없지 않습니까?”

“그래요.” 내가 그와 함께 기뻐하며 말했다. “그렇지만 진심으로 주는 선물이어야 해요.”

“알아요. 진심입니다. 그러고 나니 마음이 아주 편해요.

  그래서 나는 밝은 마음으로 크리스마스를 맞게 되었어요.

  그 아이들이 나 때문에 우유를 넉넉히 먹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군요.”

 

성탄절 휴가가 지나갔다. 2주일 후 1월의 어느 화창한 아침에 벤이 뛰다시피 빠른 걸음으로 올라왔다.

“내 말 좀 들어보세요.” 그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는 다른 우유배달원의 담당구역을 대신 돌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때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 뒤돌아보니 어떤 여자가 손에 돈을 들고 흔들며 거리를 달려 내려

오고 있었단다. 그는 그 여자를 당장 알아보았다. 우유 값을 내지 않고 이사 간 바로 그 여자였던 것이다.

그 여자는 조그만 담요에 싼 갓난아기를 안고 있었다.

“아저씨, 잠깐 기다리세요!” 그 여자가 소리쳤다. “드릴 돈이 있어요.”

벤이 트럭을 멈추고 밖으로 나왔다.

“미안해요.” 그 여자가 말했다. “난 돈을 떼어먹을 생각은 없었어요.”

그 여자의 남편이 어느 날 밤 집에 돌아와서 값이 싼 아파트를 구했고

야간 직장도 얻었다고 알려 주었다는 것이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어서 깜빡 잊고 이사 가는 집 주소를 남겨 놓지 못했다는 얘기였다.

그러면서 “그 동안 돈을 모았어요.” 라고 그 여자가 말했다. “여기 우선 20달러를 가져왔어요.”

벤이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다 지불됐어요.”

“지불되다뇨?” 그 여자가 말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누가 지불해요?”

“내가 지불했지요.”

“......”

그 여자는 마치 가브리엘 천사를 대사듯 그를 바라보다가 울음을 터뜨렸다.

 

내가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저 한 팔로 그 여자를 안았지요.

 얼떨결에 나도 울기 시작했는데 도무지 내가 왜 우는지 영문을 모르겠더라구요.

 그리고 시리얼에 우유를 타서 먹는 그 집 어린아이들이 생각나더군요.

 그 다음에 무슨 생각이 났는지 아십니까?

 나를 이렇게 하도록 설득해준 아주머니가 정말 고맙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 20달러는 안 받았겠지요?”

“받을 리가 있나요?” 그가 큰 소리로 말했다. “ 이미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 건데요.”♣

       

-리더스 다이제스트. 1993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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