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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진 외국인 선교사묘지 탐방을 가다

안산차도리 2010. 4. 25. 00:47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Yanghwajin Foreign Missionary Cemetery)

 

LMTC에서 양화진 선교사묘지 탐방을 2010년 4월 24일(토) 갔다 왔습니다.

                                                                  명칭 -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위치 -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145-8
                                                                  면적 - 13.224㎡(약 4000평)
                                                                  안장자 - 413인 중 선교사 143인 (가족포함)
                                                                  최초 피장자 - J.W. 헤론 (1890.7.28)
                                                                  관리 - 한국기독교선교 100주년 기념교회
                                                                  개원시간 - 월 ~ 토 (오전 10시-오후 5시) 

                                                                  안내시간 - 월 ~ 토 (오전 10시, 11시30분, 오후 2시, 3시30분)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목숨까지 바친 외국인 선교사와 가족들 143명이 안장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조국에서 편안하고 안정된 생활을 버리고

이땅 조선에 와서 사랑과 헌신으로

생을 마감하신 분들...

이들은 병원과 학교의 설립등 사회제도뿐 아니라

신분제 및 남존여비관습의 철폐와 같은

무형의 정신세계로도 우리 민족에게 심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더욱이 이들 중 일부는 일제의 한반도 무단 강점을 한미족과 함께 아파하였고,

우리의 독립을 위해 기꺼이 많은 위험을 감수하였습니다.

 

그리고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든 이후 아직까지 평민에게 제대로 보급이 되지 않고 있을 때

신구약 성경 번역을 통하여 한글을 널리 알리는데 큰 역활을 감당하였습니다.

(일부 사진과 글은 다음 블로그 "대한민국 훈남훈녀"에서 퍼왔습니다.)

 

 

 

H.B. 헐버트

" 한국의 은인,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외국인 "

 

" 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inster abbey "

(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 한국에 묻히기를 원한다.)

한국 교육의 선구자였던 헐버트는 배재 학당 안의 삼문 출판사에서 문서 선교를 감당하였고

그가 쓴 다양한 글들은 한국을 외국에 알리는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1903년에 창설된 한국 YMCA의 초대회장을 맡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고종의 외교 고문으로 독립을 위해 힘쓰셨으며,

비록 일본의 압력으로 실패로 돌아갔지만 헤이그에서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는 통로가 되었고

한살 때 죽은 아들이 묻혀 있는 양화진에 안장되었습니다.

 

 

 

류제한 박사 ( George Henry Rue )

1899 . 6. 27 - 1993. 11. 18

 

"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최선을 다한, 32년간의 의료 선교 봉사자 "

 " 나는 어느 누구도 소홀히 치료하지 않았습니다.

이승만 박사를 치료할 때나 시골의 아낙네를 치료할 때나

 똑같이 나의 최선의 노력을 바쳤습니다. "

류제한 박사는 메이 벨 에임스와 결혼하여 한국의료선교사로 순안병원장에 취임되었고

휘경동에 경성요양병원을 세운 뒤 부속 간호원 양성소를 개설하였습니다.

6.25 사변때 미국 대사 무초와 함께 귀국하였으며, 병원 복구사업과 부상병 치료에 전념하셨습니다.

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나는 한국에 구경삼아 나온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한국에 나의 뼈를 묻을 각오로 온 사람이었습니다.
이리가 한국 백성을 해치러 온다면 도망가는 목자로서가 아니라
그 양을 위해 희생할 각오를 하고 온 선교사였습니다."
"나는 어느 누구도 소흘히 치료하지 않았습니다.
이승만 박사를 치료할 때나 시골의 아낙네를 치료할 때나
똑같이 나의 최선의 노력을 바쳤습니다."

 

 

아펜젤러 ( Henry Gerhart Appenzeller )

 Feb 6 . 1858 - June 11 . 1902

 

" 교육 선교사로서 대대로 헌신한 가족 선교사 "

 

 

한국에 최초로 파송된 선교사인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유능한 인재를 기르는 학교) 설립하였으며,

"협성회"라는 토론회를 조직하여 학생들에게 민주주의와 독립정신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또한 삼문 출판사라는 인쇄소를 만들고 일반 신문을 인쇄하여 출판 분야에 공헌했으며,

최초의 한글 성경번역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홀 가족 ( Hall Family)

 

 

                     

 

                                                 아내 로제타 셔우드 홀                                  아들 셔우드 홀       

 

" 한국의 의료 선교를 위한 2대에 걸친 헌신 "

 

캐나다 벽촌 가난한 집안 출신인 윌리엄 홀은 의사가 되어,

뉴욕 빈민가 의료 봉사에서 만난 로제타와 서울에서 결혼했습니다.

평양 선교 개척의 중책을 맡고 평양에서 의료봉사를 하며 교회를 개척하였고

1984년 청일전쟁 부상자들과 환자를 치료하다 전염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남편의 사후 아내 로제타 홀은 두 자녀와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1897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남편을 기념하는 "기홀병원"을 평양에 세웠습니다.

그녀는 한국 여성을 미국까지 데리고 가 의학 교육을 시켜 한국 최초의 여의사를 만들었을 뿐 아니라,

한글 맞춤법에 맞는 점자법을 개발하고 평양에 최초 맹아 학교를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홀 부부의 아들 셔우드 홀과 메리언 역시 한국에서 15년 동안 의료 선교사로 일하였고

셔우드 홀은 특히 폐결핵 전문의였으며,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해서 결핵에 대한 계몽 운동을 펼치기도 하였습니다. 

양화진에는 3대에 걸쳐 6명의 홀 가족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헤론 ( John W . Heron )

1856 - 1890

 

" 양화진에 최초로 묻힌 선교사"

 

제중원의 제2대 원장

 

외국인 묘지로서 양화진에 최초로 안장되 양화진 시작되게 한 헤론은

테네시대학 의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헤티와 결혼 후 북장로회 선교사로 조선에 와

언더우드와 함께 제증원에서 의사로 일하며 환자를 돌보다 그만 이질에 걸려 

한국에 온지 5년맘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A.B. 터너 (1862~1910 영국 / 성공회)

 

성공회 제2대 주교로 한민족의 수난기에 적극 선교로

성공회의 급속한 성장과 토착화에 성공시켰으며,

YMCA 발전과 축구를 첫 도입 하는 등

한국 스포츠의 선구자였던 아서 B. 터너 선교사 묘비

터너는 주로 인천과 강화도에 집중되어 있던 성공회의 선교 사역을

수원과 충북 진천까지 확대하였습니다.

또한 1907년부터 1910년 우리나라가 일제에 강제 합병되는 시기에

YMCA회장을 맏으면서 이상재, 윤치호 등의 항일운동을 뒷받침하였습니다.

 

 

자녀를 먼저 이 땅에서 보내고,

남편과 아내를 먼저 보내면서도

이 땅에 남아서 의료, 교육 사업으로

복음을 심어주고 죽어서도 우리 곁에 남아계신 분들... 

 

 

 

스크랜턴 대부인 ( Mary F . Scranton )

Dec 9. 1832 - Oct 8. 1909

 

" 한국 근대 여성 교육의 선구자 "

 

메리 스크랜턴 대부인과 초기 이화학당 학생들

 

 

윌리암 B. 스크랜톤 선교사(1856-1922)  

 

52세 되던 해 해외 여선교회 선교사로 외아들 내외와 함께 한국에 온 스크랜턴 대부인은

이화학당을 열어 근대 여성 교육의 선구자 역할을 하였다.

조선 여성들을 향한 절절한 사랑으로 24년동안 일한 스크랜턴 대부인은

76세에 세상을 떠나 양화진에 안장되었습니다.

 

 

 

 

이 분들을 사랑합니다~♥

 

 

 

 

 

 

언드우드 일가 묘역

 

" 한국 선교의 개척자 3대에 걸쳐 조선기독교대학(연세대학교)에서 헌신"

 

 

 

 

 

릴리아스 호튼 언더우드, 제중원 최초 부인과 의사(A.I. 앨러스)로 언더우드와 결혼(호튼 언더우드)하였다.

 

1885년 25세의 나이로 한국에 와 한국 선교의 개척자인 언더우드

초대 성경 번역 위원장이었으며, 영한사전, 한영사전, 한국어문법서 등을 손수 만들어 출판하였고

새문안 교회의 설립자이자, "연희 전문학교(연세대학교)를 설립자인 그는

초대 학장을 맡아 한국 대학 교육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언더우드 가의 4대에 걸친 7명이 양화진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기도

오,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와 앉히셨습니다..
그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한 이곳..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있는지도..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 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어 주겠다 하면..
의심부터 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질 않습니다..
가마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찌하나 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질 않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때 ..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으로 ..
볼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 수 있게 될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있는 것 같사오나..
지금은 우리가 서양귀신..양귀자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저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백성..한 자녀임을..알고
눈물로 기뻐 할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 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 뵈지않는 보는 조선의 마음 언더우드 선교사님의 기도 -

 

 

 

 

 

 

아래에는 국민일보  2010년 3월 31일자 내용중 일부입니다.

 

[Monthly 미션-땅] 외국인 선교사 묻힌 서울 양화진묘원을 찾아서
 

 

 

서울 합정동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 면적 1만3224㎡의 이 동산에는 413기의 무덤이 자리 잡고 있다.

이중 143기가 이 땅에 복음을 전한 선교사들이 안장된 곳이다. 

.......................

 

 무덤 가운데 상당수는 이 땅에 오자마자 세상을 떠난 영아와 유아들의 것이었다.

묘비명을 읽으면서 생각해 보았다. 아마 누구나 비슷한 생각을 하리라.

‘이들은 100여 년 전 어떻게 조선 땅에 올 수 있었을까. 그 결심을 할 수 있게 만든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양화진은 삶과 죽음, 인생, 사명, 그리고 땅을 생각하게 만드는 장소다.

고 한경직 목사는 생전에 “이 땅의 그리스도인이라면 꼭 한번 찾아가 보아야 할 곳이 있다”고 말했다.

바로 양화진이다.

한 목사는 그 땅을 밟아보라고 당부했다.

이 묘지공원은 1890년 7월,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이며 고종의 시의였던

존 헤론이 양화진에 묻히면서 조성되기 시작했다.

지금 이곳에는 부활 주일 우리나라에 처음 복음을 들고 온 언더우드, 아펜젤러를 비롯해

헤이그에 가서 일제의 만행을 고발한 헐버트, 평양의 의료선교사 홀,

양반과 천민의 신분제도 철폐를 주장한 무어 등 조선을 개화시키는 데 헌신한 분들이 묻혀 있다.

이들에게 당시 조선은 ‘땅 끝’이었다.

이들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난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이 지시한 ‘그 땅’을 찾아 갔다.

조선이었다. 사명에 불탄 가슴으로 이 땅의 흙을 밟은 그들은 세월이 흘러 지금 흙으로 남아 있다.

그 땅을 우리가 밟는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이 땅에서 한 알의 밀알이 된 그들 덕분에 우리가 오늘 풍성한 복음을 향유하고 있다.

그들은 떠났지만 고귀한 정신은 남았다.

양화진은 삶과 죽음이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참배객들에게 알려준다.

짧은 한 줄의 묘비명은 우리에게 말해준다. 인생과 성공과 사명이 무엇인지를.

양화진을 방문한 사람들이 가장 감동을 받는 묘비명이 있다.

미국 의료 선교사 켄드릭의 묘비에 적혀 있는 문구.

 “나에게 천 번의 생명이 있다 해도 나는 그 모두를 조선을 위해 바치리라.”

간호사인 켄드릭은 1908년 숨을 거뒀다. 26세. 조선에 온 지 8개월 만이었다.

그녀의 선교 열정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뛰어 넘었다.

그녀는 소천 전 자신을 파송한 선교부에

“만일 내가 죽으면 텍사스의 엡윗청년회원들에게 열씩, 스물씩, 쉰씩

아침 저녁으로 조선에 오라고 전해 주세요”라고 편지했다.

그녀는 ‘허망하게’ 죽지 않았다.

소천 이후 엡윗청년회에서 20여명이 선교에 헌신했고 몇 명이 조선으로 건너왔다.

양화진에 최초로 묻힌 헤론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는 묘비명을 남겼다.

1885년 조선을 찾아 의료 선교와 성경 번역에 헌신한 그는 34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쳤다.

양화진 묘원 초입에 보면 ‘한국 사람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외국인’으로 칭송받는

헐버트 선교사묘지가 보인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줬던 묘비명이 거기 써 있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조선을 사랑했기에 그는 고종의 밀사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유명한 언더우드“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를,

아펜젤러“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습니다”는 묘비명을 남겼다.
....................


100여 년 전 벽안의 선교사들은 조선을 ‘땅 끝’으로 여기고 믿음으로 이 땅에 들어왔다. 그리고 죽었다.

그때부터 100년 후, 2만여 명의 한국인 선교사들이 ‘땅 끝’을 향해 나갔다. 일부는 그곳에 묻힐 것이다.

오직 주님을 위해 양화진에 묻힌 자나, 이 지구상 어느 곳에 묻힌 자나 천국에서 감격의 해후를 할 것이다.

소설가 정연희 권사는 이야기 선교사인 "양화진"에서 이렇게 썼다.

 

 

 

                                                                   양화진 

                                                                   영혼의 고향 하늘나라로 가는 길목

                                                                   백년 전에 이 땅을 예수께서 지적하신 땅 끝으로 믿고

                                                                   아비의 집을 떠난 젊은이들이

                                                                   그 생애를 기꺼이 바치고 주안에서 잠든 곳.